(다시) 매일 글쓰기 (034/100)
<뉴스룸>이라는 드라마에 빠져 산 날들이 있었다. 어려운 문제들, 신념으로 뉴스를 만들어가는 이야기.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것. 직업으로의 소명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적 허영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도 한몫을 하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웨스트윙> 도 보았다. 지금은 내려갔지만 왓챠 플레이에서 볼 수 있었던 시절에 밥 먹을 때도 볼 정도로 빠져 있었다.
물론 99년에 처음 방영된 드라마로 화질도, 비율도 엉망이고, 어려운 미국 정치적인 내용과 긴 대사들은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고, 나의 영어 실력은 많이 낮아서 이를 제대로 즐겼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뉴스룸만큼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뉴스룸>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게 만든 드라마였다. 그리고 아론 소킨의 전작 <웨스트윙>은 그 부분을 더 잘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의사결정의 본질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게 만들었는데, 특히 국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딜레마와 그에 따른 의사결정의 과정을 보며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웨스트윙>은 미국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이 국가를 운영하며 끊임없이 직면하는 딜레마와 선택의 순간들을 매우 인간적이고 진솔하게 그려낸 드라마이다. 미국이라는 국가를 운영하는 백악관의 리더, 대통령의 의사결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보좌관들의 이야기이다. 미국도 늘 예산이 부족하고, 의사결정이라 함은 야당의 반발을 불러들일 수도 있고.
의사결정의 과정을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묘사하면서, 그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정치란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까의 문제이다. 선택의 문제이며, 그로 인한 갈등의 해소가 필요한 게임이다. 그래서 결국 삶에 관한 이야기이고, 사회를 이루게 되는 모든 조직에서 쓸모 있는 개념이다.
여론전에 있어서 신념을 지키는 의사결정은 또 표심의 이탈을 야기할 수도 있다. 진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러스트 벨트, 농장주가 많인 지역의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전략은 필요하지만 굳건한 신념이 받쳐주지 않으면 칼날은 목표를 꿰뚫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웨스트윙>의 이야기들이 극화되고, 때로는 너무 관념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본질적인 선택의 어려움과 이에 수반하는 사이드 이펙트, 그것에 대한 수용과 같은 이야기들은 직장 생황에도 잘 적용될 것이라고 느꼈다.
<웨스트 윙>에서 조스 바트렛 대통령이 자주 던지는 "What's next?"라는 걸 조시 라이먼이 처음 듣는 때가 나온다. 의견을 제시하고 나서, 동의하고 나니 빠르게 다음 안건을 찾는 모습이었다. 여기에 당황한 조시 라이먼에게, 결정된 것 다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선배가 이야기해 준다. 의사결정의 속도와 단호함. 이게 참 멋지게 보였다.
또한 조시 라이먼의 "Decisions are made by those who show up"라는 말은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을 다하는 자세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아론 소킨은 정치 참여를 위한 밑밥으로 쓴 것이겠지만, 회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웨스트윙>에서 배운 의사결정의 교훈은 제품 관리(PM/PO) 역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PO이다. 기획자, PM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름이 중요할까, 꽃이라고 불리는 순간 의미를 얻을 것이니, 또한 중요하진 않다. - 장미를 장미라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향기가 사라지진 않으니.
각설, 이 직무는 ‘의사결정’을 잘해야 한다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최근에 이 직무의 주니어 포지션 면접을 볼 때, 네가 생각하는 중요한 역량이 무엇이냐에 의사결정은 늘 나온다. 왜냐면 이 직무는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갈래의 가능성 중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니까.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팀의 신념을 유지하면서도 실용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PM/PO로서 새로운 기능을 도입할 때 선택의 딜레마가 발생할 수 있다. 특정 기능이 팀의 장기적 비전과 일치하지만, 현재 자원 상황에서는 구현이 어려운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결정은 개인의 역량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의사결정의 조직의 역량이며 리더, 혹은 결정권자는 그에 수반하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해결책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의사결정이 필요한 순간은 예측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것이나 딜레마적인 상황 - 양자택일, 선택지를 좁혀야만 하는 순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혼자만의 역량으로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의사결정은 조직의 문화와 철학을 반영해야 하며, 팀이 얼마나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리더는 단독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팀이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을 조율하고, 결정된 사항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결정이 민주적일 수 없고, 민주주의가 꼭 다수결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의사결정이 민주적이라는 것은 논의의 수평적 확장과 수렴의 자유로움이 전제되는 것이어야 하지 결정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의견의 압력 속에서 무른 탄소 같은 아이디어가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도록 생각들을 모아내는 것이 의사결정이라면, 그것은 PM/PO의 일이 맞겠지.
<웨스트윙> 리뷰를 쓰기에는 다시 한번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HBO MAX의 한국 진출이 지지부진해지고, 관련한 판권 계약은 만료되어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상태여서 그냥 요즘에 드는 생각과 엮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옅은 생각들로 채색된 글이라, 굳이 주제문을 다시 써보자면, 의사결정의 역량은 조직적으로 길러져야 하는 것이지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대한 잡설이었다.
초고: 2023.08.18
탈고: 2024.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