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쌩날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min Jan 16. 2017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by 제임스 건

WE ARE GROOOOOOOT!!

이 영화를 나는 2회 관람하였다. 즐거운 기분으로 "우리는 그루트이다!!(We Are Groot!!!)"을 외치며 나올 수 있었다. 한 편의 유쾌한 스페이스 판타지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과 함께 이 글을 기획하게 되었다. 


도대체 그루트가 무엇이길래 우주적인 수집가 콜렉터의 관심을 끌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하나로 뭉치게 하였는가. 


'그루트'는 무엇이란 말인가!!

스페이스 판타지의 클래식, 스타워즈에는  R2-D2 가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적인 그의 활약은 프리퀄 트릴로지(EP 1,2,3)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그처럼, 그루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활약한다. 단조로운 대사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유일한 통역가인 C3PO와 R2-D2의 캐미처럼, 로켓과 그루트의 캐미도 좋았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 자기희생을 하는 것 까지도 유사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 그루트는 마지막 순간,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의 문장을 구성한다. 그리고 소통한다. 그루트는 단수가 아니었다.


그루트가 언제나처럼 영화 막바지에서나 뭉친 영웅들을 감싸 안고 희생한 연후에 스타로드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손을 잡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마블이 내년에나 나올 영화 '어벤저스 2: 울트론의 시대'의 메인 빌런 역할을 준비하고 있는 타노스가 원하는 인피니티 스톤을 잠시나마 극복하였다. 


또 다른 영화의 이야기를 빌려 오겠다. 히어로 무비의 대다수는 결국 친한 동료의 죽음으로 뭉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마블의 역작, "어벤저스"에서도 콜슨 요원의 죽음이 필요하였다. 각성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왔다.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결국 현실을 반영한다. 이 명제를 받아들이자면, 누군가의 희생은 다른 이들의 각성의 기제가 된다라는 점이 분명해져야 한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받은 것을 앞으로 되갚을 수 있는가(Pay it forward). 


Pay it forward는 비단 영화의 제목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칼럼에서는 미 서부의 개척정신이 이에 기반하였고, 동부에 비해서 혁신이 더 등장할 수 있는, 실리콘 밸리가 있을 수 있는 정신이 바로 Pay it forward라고 말하였다. 백 퍼센트 동의하긴 어렵지만, 재미있는 분석이었다. 나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지 대다수의 현대 국가 체제는 이 Pay it forward 의 정신으로 유지되는 점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가와 법체제는 결코 하늘의 구멍처럼 설기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미담'의 사회학이란, 그래서 나온다. 사회 시스템이 동작하지 않을 때, 우린 미담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소셜 네트워크 상에서 회자된 아우디 오너의 폐지 할머니에 대한 미담, 금번 신입사원을 위한 자동차 주인의 미담. 세월호 탑승자를 위해 어선을 끌고 나온 자들의 미담. 그러나 미담이 잦은 사회가 바르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맞는 말이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기에, 사람의 인력으로 메꾸는 것이 미담이다. 사람의 인성에, 믿기 어려운 그 마음에 기대야만 하는 순간에 미담이 작동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느리다. 모두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시대는 아직 한참 더 남았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우리는 손을 맞잡고 가야만 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등장하는 전우주적 악당, 타노스와 로난. 그들이 은유(metaphor)라면, 그게 무엇인지는 모두에게 다른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손을 맞잡지 않고 그것에 맞서 싸울 순 없다. 슈퍼맨과 배트맨으로 대변되는 최근 DC 코믹스의 영화와 마블코믹스의 영화가 달랐던 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DC는 영웅에 탄생에 더 큰 비중을 두었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는 그 탄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고, 어떻게 역경을 극복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함께 해야만 한다.(물론 만화책은 아니긴 하지만...) 최근 등장했던 다수의 DC 코믹스 영화의 주인공들은 심적으로나 힘으로나 진정한 초인이며 '히어로'였다. 사이드킥이 필요하긴 했지만, 주요한 갈등은 모두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자기 각성이었으며, 스스로의 단련이었다. 그래서 배트맨은 고담시의 다크나이트가 될 수밖에 없었고, 슈퍼맨은 원래 반신에 가깝다. 하지만 토르 2에서 토르는 그 막대한 파워와 함께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였다. 함께 해야만 했다. 소니에 판권이 넘어간 스파이더맨의 리붓 시리즈(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역시 사람들과 함께하는 영웅의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그루트는 어쨌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히어로 중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반면 가장 모자란 부분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나무가 가지고 있는 심상은 구걸하는 어린아이에게 꽃을 선물하는 영웅의 모습을 그려 내었다. 단순 무식하지만 가장 순수한 영웅의 죽음은 결국 다른 영웅들의 각성과, pay it forward를 이끌어내고야 만다. 가장 강력한 존재이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 그루트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자기희생 정신밖에 없었다. 


영화는 세상을 비꼬아 반영하곤 한다. 지금 세상에서 희생하는 자들은 가진 자가 아니라, 가장 못난 자의 역할이 되었다. 가진 자가 제 목숨을 걸고 나서는 모습을 본 일이 있는가. 우리가 교황이 방탄 처리도 안된 차량에 오르는 모습에 감동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지금 이 사회에서 가장 슬픈 자들이 목숨 걸고 단식하는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라는 말은, 슬프지만 약자에게 통하지 않을 성싶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른 약자가 아닌 바로 자신이. 그렇기에 모두가 함께 갈 수 있었다. 대장선 홀로 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는 기대한다. 그것이 바로 그루트이기 때문이다.


영웅의 죽음으로만 사회가 굴러 간다면, 의인의 희생으로만 사회가 지켜진다면 그것도 잘못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필요한 순간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을 기대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가진 자는 스스로 속도를 줄일 수 없는 설국열차가 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손을 맞잡을 수 있다. 손을 맞잡을 때 우리는 그루트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읽고 나서 내린 뻔한 결론이다. 


2014년 8월 16일 초고

서울

매거진의 이전글 <눌변> by 김찬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