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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Jan 03. 2017

<눌변> by 김찬호

어눌함에 관하여

0. 내겐 어눌함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웅변 학원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받은 칭찬이 아직도 그리워서였을까. 아니면 그때 혼난 것이 트라우마가 된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어눌함이 묻어 나오는 말이 나올 때면 난 부끄러웠다. 나는 달변이 아니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다. 


1. 왜 우리는 달변을 좋아했을까.


근대.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교육제도. 정규 교육과정 속에 나는 눌변을 허용하지 않는 교육을 받았다. 이건 제도권이 바라는 인재상을 뽑기 위한 줄 세우기에 말하기/쓰기가 포함되어서이지 않을까. 또한 제도권 밖의 교육도 그것을 지적하는 '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언어로 세상을 인지하는 사람이기에, 진보도 보수도 모두 달변이 필요한 것 같다. 


자기 PR의 시대라던 때가 있었다. 말은 표현이고, 그것을 잘하는 것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눌변이 비난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멸시를 받은 것은 아닐까, 의심을 지울 순 없었다. 생존을 위한 기술이 달리기, 던지기 등에서 말하기와 쓰기로 대체된 것이니까, 열등한 존재로 보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달변은 설득을 보다 직관적으로 하는 방법이니까. 그렇게 흐른 세월이 천년이 지나온 것이다. 논리는 단어들 속에 구성되기 마련이고, 그 외의 의사소통 방법은 '비효율적'이니까. 세상을 디자인한다 여기는 엘리트들은 언어유희를 낙으로 여기는, 그것을 못하는 이들을 천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든 것 같다. 언어는 또한 선민의식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말 잘하는 것을 똑똑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똑똑하다는 것은 대체로 근대화 이후의 사회에선 더 뛰어난, 더 나은 사람으로 이어주는 꾸밈말이다. 물론 말이라는 것은 생각을 구성하는 것이기에 대체로 올바른 판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엄밀한 관점에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은 대체로 한쪽에 치우친 재능의 발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로, 글로 사람을 판단한다. 옛 시절엔 글씨로도 판단했다고 하니까. 마법과 같은 것을 다룬 신화 체계에서 말에 부여하는 의미들은 엄청나다. 그러니 눌변들은 어리숙하고, 열등한 존재로 인지될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을 가졌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달변'이라는 표현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 선호는 결국 모두가 가진 생존 전략의 하나일지도 모르겠고. 


2. 눌변에 대한 변명 혹은 달변에 대한 경계


 저자는 스스로를 눌변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책 전체에 깔린 그의 생각은 절대 어눌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가 눌변이었다면, 어느 순간순간마다 그의 좋은 생각은 달변에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았겠지. 다행히 인간은 말 다음에 글을 발명하여 이런 생각이 담겨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 같다. 그렇게 저자는 스스로의 시각으로 본 세상에 대해서 담담하게 그린다. 어쩌면 눌변을 지닌 자들의 생각이 이러진 않을까. 물론 그 시각의 방향은 다를 수 있지만, 남들보다 말을 잘 못한다고 해서 생각까지 그런 것은 아니니까.


 침묵이나 말을 덜 하는 것을 중히 여긴 우리 옛 모습에 대한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문인의 정권이 수백 년이나 지속된, 말에 비롯된 글로 관료를 뽑는 문화에서 참 재밌단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필요한 경계라고 생각한다. 우리 손으로 뽑은 지도자가 파시즘의 광기를 꽃피울 때, 그 앞에는 대체로 '달변'을 통한 선동이 있었다. 그게 바른 이의 손에서 휘둘러질 때와, 그러지 않은 이의 손에 들려 있을 때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한국에 사기 범죄가 그렇게 많은 것과 이어 생각하면 참 쓴웃음이 나온다. 개화기 시절 외국인이 한국인에는 거짓을 말하는 이가 참 많다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 사실을 접한 칼럼에서는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잘 속아 넘어가 주었기에 그리 횡행할 수 있었겠냔 주장을 펼쳤다, 글쓴이가. 


3. 사이다와 고구마


 글을 잘 쓴다는 것도 오묘하다. 무엇이 글을 잘 쓰는 것인가. 대체로 사람들이 '달변'에 보내는 찬사와 유사하다. 사실, 말을 유려하게 잘 하는 것은 내 진영을 넘어서서 날 설득할 정도의 힘이 있는 것이거나, 혹은 내가 생각하되 표현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니까. 그런 걸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소셜 미디어에 범람하는 '사이다' 같다. 물론 필요하고, 유용한 말, 글들이다. 우리 목에 걸린 고구마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사이다를 쏟다 보면 목이 매우 따갑거나, 살이 찌겠지. 


눌변을 하는 사람은 어쩌면 낱말 하나하나를 고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정치적인 승리를 위해 올바른 전략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하나의 절대 가치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사이다가 마시고 싶은 때에는 사이다가 필요하고, 바른말을 고구마처럼 씹어 삼켜야 할 때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4. 글과 말속에는 내가 있을까. 아니라면 무엇이 있을까.


말쟁이, 글쟁이들은 그 안에서 사람의 품격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 같은 범인의 글쓰기와 말하기에서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단편들조차도 내 모든 것이 아니다. 내가 드러내지 않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것이니까. 맥락에 따라서 누군가는 달변이 되고 눌변이 되고 그런다. 우리에게 던 저진 상황 속에서 어떤 역할로 몰입해야 하는가. 침묵이 금일 수 있다에서 이어지는 저자의 이야기처럼, 사실 비언어적 소통을 통해서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사람의 언어는 새의 노랫소리에서 진화했다는 의견이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가사 하나 없는 클래식 음악을 배경 설명 없이 들으면서도 무언가 전달되는 기분을 받기도 한다. 오히려 난 달변은 때로는 자기변명을 위해서 사용되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여기 있다는 자기 증명. 어린아이 일 때는 울음만으로 증명하던 것이 진화된 것이 이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나쁘다'라는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게 필요하다. 우리는 내 존재를 이 자리에 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니까. 


저자의 글 중에서 세월호에 대해서 언급한 글이 꽤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 달변과 눌변들이 기억난다. 다시, 달변과 눌변에 대한 가치판단은 무의미한 것 같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달변을 펼치던 이들이, 말 잘하는 앵커들이 저지른 실수들, 언어를 기반으로 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사회 지도층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들의 행태를 보았다. 그리고 난 지난 총선에서 탈을 쓰고 비언어적 소통 수단의 큰 부분까지도 가리고 거리로 나선 사람들을 기억한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한 국회의원에게 전해져서 지금 국회 속에서 달변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을 잘하고 못 하고,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어쩌면 줄 세우는 우리 사회에서는 생존의 수단으로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금이니까. 


0. 다시 생각해도 나는 말을 잘 하고 싶다. 


어디선가 빛나고 싶은 것이겠지. 내가 더 잘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겠지. 그 보다는 따뜻한 단어를 고르다가 지쳐, 쓰이지 못한 편지에 그리움만 쏟아내는 사람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만, 나 역시 세상에 퍼진 단어들 사이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어눌한 말투에 감춰진 진심을 읽을 눈은 기르고 싶어 졌다, 다시. 이 책을 보면서. 


#트레바리 #1701 시즌 #17 #눌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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