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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Nov 14. 2016

어른, 이어폰 그리고 찻잔

제멋대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침착하게 헛소리를 할 수 있는 이유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아마, 책임감이 싫어서 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평생 머리는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사고를 하는 아저씨가 되고 말겠지. 내게는 딱 적당한 결말이다. 


이런 나도 가끔은 어른처럼 굴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난 이런 방식을 쓰는 편이다. '신사(Gentleman)'이 되는 법에 대해 '나리타 료우고' 가 <뱀프!>에서 묘사한 것이다. 바로 나와 상대 그리고 상황 속에 테이블과 찻잔을 들여놓는 것이다.


내가 본 가장 어른다운 모습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응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 묘사가 꽤 와 닿았었다. 이를테면, 월급날이 지났는데도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은 통장과 나 사이에 테이블, 그리고 찻잔을 둬 보는 것이다. (얼그레이가 좋겠다) 그럼 대화를 할 수 있겠지. '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글쎄, 잔고보다 입출금 내역을 보면 되지 않을까?' 뭐 이런 식으로. 그럼 복싱장에서 무리하게 샌드백을 치는 일이 없을 거고, 그래서 손목이 나가지 않을 거고 고로 없는 와중에 병원비로 돈이 또 빠져나가지 않아 더 화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산 지 얼마가 되었다고 박살 이나 버린 내 이어폰에게 슬며시 말을 걸어 보았다. 



그야, 내가 좀 거칠게 다뤘지만 단선이 된 것도 아니고, 하우징이 박살이 난 건 아무리 1~2개월간 험하게 다룬 상황이래도 이해할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이 친구는 아주 값이 싼 친구이고, 그러니 설계를 하던 사람이 노동 착취를 당해가며 하우징을 설계해서 이렇게 충격이 누적되는 상황에 견딜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공장에서도 아마 제대로 된 재료를 쓰지 않았겠지.


물론, 올바르지 않은 제품은 아무리 값이 싸도 이해해주면 안 되는 것은 맞지. 그래도 살아 있을 적에 이 친구(이어폰) 은 내게 Derek and dominos의 <Layla>를 수십 번도 넘게 들려주었고 그제부터는 Eagles의 <Hotel California> 나 Les Miserable 의 <Do you hear people sing>을 신나게 틀어 주었으니까. 어쩌면 그 가치를 충분히 다한 건 아닐까, 란 생각도 들고.


플라스틱을 접착하기 위한 도구로 흔들리는 너(이어폰)의 하우징을 붙잡으려 한 것도 사실은 내 잘못일 테고 말이야. 또 덕분에 가지고 싶었던 Marley의 up lift 이어폰을 샀으니 결과적으로 통장 빼고는 다 행복한 결론 아닐까? 아 물론 넌 수명을 다했지만, 그래도 내가 예전과 다르게 근래에는 시대에 명곡이라고 칭할 만한 애들을 골라서 들었으니 짧은 인생이지만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뭐 이런 식의 의식의 흐름. 덕분에 짜증이 많이 나는 요즘에 벌어진, 화가 날 법도 한 상황을 웃으며 넘기면서 코엑스 에이샵에서 새로운 이어폰을 집어 왔다. 


이 방법이 하지만 매번 통하는 건 아니다. 내 지식과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분명히 있고. 무엇보다 말을 걸어오지 않는 상황이 있다. 사물과 나 사이에 찻잔을 놓을 때면 대체로 그건 나 자신과의 대화가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분노한 나 자신과, 과거의 나 자신 뭐 이런 아이들), 그러니 대체로 문제가 잘 풀리는 편이다. 해결이 되는 건 아니지만, 분노에 휩싸이진 않으니까. 


보통 이게 안 통하는 때는, 그러니까 내가 얼굴 한 번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과의 관계 같은 때. '나한테 왜 이랬어요' 라며 아무리 물어봐도 닿지 않는 거리에 앉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이 방법의 실패는.


나는 이번 토요일에 광화문에서, 경복궁에서 그리고 시청 광장에서 매우 조용히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단 느낌을 받았다. 테이블 위에 찻잔에 담긴 건 페퍼민트였을 것 같다. 상쾌함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조용히 말을 걸었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고. 약간 화가 났는데, 나 좀 달래주면 안 되겠냐고. 뭐, 폭언이 되돌아온 것 같진 않은데,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2일이나 지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해도 말을 섞기 어려운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나 자신과는 그렇게 화해했다. 하지만, 그 날 맞은편에 앉아 있어야 했을 사람이 아예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과는 결별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아이를 위해 수십 번 반복해서 말해 줄 각오를 해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차의 풍취를 느끼지 못할 테니 달콤한 코코아라도 준비해야 할 것이고. 뭐 그렇게 또 테이블을 펼치러 이번 토요일에도 광장에 갈 것 같다. 


걍 그렇단 생각이 들어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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