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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기억과 상징물: 흉물과 기념비 사이

365 Proejct (301/365)

by Jamin

첫 인상과 시간의 변화

코엑스 앞 강남스타일 동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단 하나였다. '흉물.' 도저히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형태, 과장된 포즈, 어색한 비례. 세금으로 이런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씁쓸함마저 느껴졌다.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도시 한가운데 세워진 이 조형물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상은 점차 강남 풍경의 일부가 되었고, 어느새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말춤을 따라 하며 즐겁게 사진을 찍는 모습, SNS에 올라오는 수많은 인증샷들을 보며, 나는 그 조형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여전히 미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 시대의 어떤 순간을 담아낸 공공의 기억을 위한 표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경험은 나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공공미술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미적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큰 무언가를 담는 그릇인가?


공공의 기억은 무엇을 담는가


우리는 종종 "공공의 기억"을 국가적 성취나 자랑스러운 순간만으로 좁게 이해한다. K-pop의 세계적 성공,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 이런 승리의 순간들은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고, 실제로 많은 공공 상징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다.


하지만 공공의 기억은 그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아픔의 기억도 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비, 제주 4·3 평화공원, 세월호 기억공간처럼, 사회적 비극과 고통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물들. 이것들은 불편하고 무겁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담고 있다.


일상의 기억도 공공의 영역에 속한다. 동네 골목의 소박한 벽화, 사라진 옛 시장터의 표지석, 철거된 공장 터에 남은 굴뚝, 녹슨 공중전화 부스. 이런 것들은 거창한 역사적 사건은 아니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과 감정을 증언한다.


그리고 논란의 기억이 있다. 못생겼다고, 쓸데없다고, 세금 낭비라고 욕먹던 조형물들. 하지만 바로 그 논란 자체가 그 시대의 행정 시스템, 미적 취향, 공공 담론의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비판받는 것조차 하나의 기록이다.


공공미술은 바로 이 복합적인 기억의 총체를 물리적 형태로 새기는 행위다.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겪은 경험 전체—영광과 수치, 기쁨과 슬픔, 합의와 논쟁—를 공간 속에 붙잡아두는 것이다. 그렇기에 공공미술은 때로 불편하고, 때로 추하며,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흉물에서 아이콘으로: 시간이 만드는 아이러니


역사는 흥미로운 패턴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흉물로 비난받던 공공미술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도시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에펠탑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졌을 때 파리 지식인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 금속 덩어리가 파리의 아름다움을 망친다"는 항의 서한이 빗발쳤고, 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지금 에펠탑 없는 파리를 상상할 수 있는가?


시카고의 '클라우드 게이트'(일명 '더 빈')는 2004년 설치 당시 "거대한 젤리빈", "쓸모없는 은색 콩" 같은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시카고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조형물이 되었고,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시애틀의 스페이스 니들도 1962년 처음 세워졌을 때는 "UFO 같다", "도시 경관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금은 시애틀의 정체성 그 자체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공공미술의 가치는 즉각적인 미적 만족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축적되는 집단적 경험에 있다는 점이다. 못생겼다는 평가조차 결국은 그 시대 사람들이 공유한 경험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논란, 그 불편함, 그 거부감 자체가 세월이 흐르면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결국 그것이 공공의 기억을 상징하는 기념비로 변모한다.


강남스타일 동상 역시 정확히 이 아이러니의 궤적 위에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못생겼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미 그 조형물은 2012년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와 만났던 그 특별한 순간의 흔적을 고정시키는 기념비가 되었다. 그것은 K-pop 열풍의 초기를 증언하고, 유튜브 시대의 문화 현상을 기록하며, 강남이라는 공간이 가진 상징성을 드러낸다.


개인의 취향과 공동체의 기억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그 동상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형적으로 세련되지 못하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 어렵다. 내 개인적 취향으로는 그것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여전히 불편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것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공미술은 나 한 사람의 취향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기억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공공의 영역은 개인의 선호를 초월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며, 그 안에 세워지는 상징물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과 마주한다. 공공미술의 기준은 무엇인가? 전문가의 미적 판단인가, 대중의 호응인가, 역사적 의미인가? 답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의 복잡한 조합일 것이다. 그리고 그 조합은 시간이 지나야만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


공공의 기억은 성공과 자랑만이 아니라, 아픔과 논란, 심지어 우스꽝스러움까지도 담는다. 강남스타일 동상은 바로 그 양가적 성격—못생김과 상징성, 불편함과 자부심, 비판과 애정—을 모두 품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흉물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즐거운 추억이 깃든 장소다. 어떤 이에게는 세금 낭비의 증거지만, 다른 이에게는 한류의 자랑스러운 상징이다.


모순 속에서 기억하기


결국 공공미술의 본질은 이 모순을 견디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좋아하는 것도, 모두가 싫어하는 것도 아닌, 논쟁적이고 불완전하며 때로 불편한 그 무엇.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게 된다.


코엑스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여전히 그 동상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못생겼다는 생각과 함께, 동시에 그것이 2010년대의 어떤 열광과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양가감정이야말로, 공공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진짜 선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우리의 선택은 때로 실수투성이고, 우리의 취향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공공미술은 바로 그 불완전한 우리를, 논쟁하고 변화하는 우리를, 그대로 기록한다. 흉물이든 기념비든, 그것은 결국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일부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의 논란마저 하나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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