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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쌩날리뷰 001: 귀멸의 칼날 (만화책)
출장지의 인터넷이 닿지 않는 밤, 우연히 펼친 귀멸의 칼날은 예상 밖의 속도로 완주를 이끌었다. 끝을 알 수 없이 늘어지는 대하가 아니라, 한 호흡으로 달려 결착을 내는 이야기의 리듬—이 작품이 가진 핵심 강점은 바로 그 응축의 미학이다.
총 23권이라는 분량은 결핍이 아니라 전략이다. 에피소드가 미니시리즈처럼 정교하게 맞물리며, 불필요한 지류를 과감히 덜어낸 덕에 기승전결의 명료함이 돋보인다. 본편은 “딱” 하고 닫히고, 남는 여백은 외전으로도 충분히 메울 수 있을 만큼 서사의 여유가 남는다. 결말 역시 감정 폭발형 카타르시스보다는 조용한 안도에 가까운 정조를 택해, 완결의 맛을 과시하기보다 절제된 잔향을 남긴다.
주인공 탄지로는 분노로 세계를 태우지 않는다. 그는 상처를 외려 연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인물이다. 뒤틀린 안티히어로가 대세가 된 오늘의 장르 문법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주인공”은 낯설 만큼 신선하다. 이 선함은 감상적 선언에 머물지 않고, 선택의 순간마다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고 욕망을 절제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구현된다. 그 결과 독자는 ‘이겨서 멋진’ 승리가 아니라 ‘옳아서 설득되는’ 승리를 경험한다.
작품에는 신파적 정조가 분명히 흐른다. 그러나 그것이 눈물의 소비로 기운 적은 드물다. 중심에는 희생이라는 일관된 테마가 있다. ‘오니(한국어 번역에서는 도깨비)’로 불리는 적대자들조차 악의 기계가 아니라 사연과 결핍을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각자의 마지막 장면이 따뜻하게 조명될 때, 작품은 왕도물의 공식을 넘어 타자에 대한 애도와 이해라는 층위를 획득한다.
전투는 화려하지만, 화려함이 목표가 되지는 않는다. 누가 더 강한가의 서열 매기기 대신, 왜 싸우는가—무엇을 지키려는가가 앞선다. 캐릭터의 기술은 공중에 뜬 ‘이펙트’가 아니라, 그들의 상처와 기억으로부터 파생된 서사의 결과로 제시된다. 이 선택은 흔한 파워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액션을 감탄의 볼거리에서 납득의 드라마로 전환한다.
결말은 해피엔딩의 형식을 취하지만, 환호보다 안도의 호흡이 길다. 극적 폭발을 누르고 삶으로 돌아가는 감정의 수위를 택함으로써, 이야기는 무대 바깥의 현실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독자는 울컥함 대신 ‘이제 안 괜찮을 수 있던 것들이 괜찮아졌다’는 회복의 감각을 받는다.
탄지로가 끝까지 선한 윤리를 유지하기에, 내면의 어둠을 깊게 파고드는 장면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 점은 심리적 입체감의 농도를 낮추는 대신, 작품이 추구한 밀도와 호흡을 지키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장르의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윤리적 주제를 온전히 관통하기 위해 포기한 면이 분명 있으며, 그 균형은 대체로 설득력 있게 유지된다.
귀멸의 칼날은 “짧지만 단단하다”는 평가가 가장 어울린다. 응축된 플롯, 선함의 윤리, 희생으로 정리된 정서, 동기화된 액션—이 네 축이 완결이라는 울림으로 모인다.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 인터넷 없는 밤에 우연히 만났던 이 작품은, 여전히 선한 서사가 필요한 이유를 과장 없이 증명한다. 개인적으로는 선의 길을 묵묵히 걷는 주인공의 태도가 오래전 읽었던 무협소설 천애협로를 떠올리게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