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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쌩날리뷰 001: 귀멸의 칼날 (만화책)
RE-쌩날리뷰 001: 자살하는 대한민국
지인의 책을 읽는다는 일은 언제나 묘하다.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질문을 함께 떠안게 된다. 『자살하는 대한민국』은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 사회는 지쳐 있고, 이미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다고. 그것은 새로운 폭로라기보다, 오래전부터 속으로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는 일에 가깝다. ‘헬조선’이라는 말, ‘망국론’이라는 진단 — 이제는 반박할 힘조차 없는, 슬픈 합의가 되어버린 상식. 누군가는 이를 조롱처럼 던지고, 누군가는 절망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공통된 점이 있다. 더 이상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은 마치 해부하듯 이 사회를 펼쳐 보인다. 자살률, 출산율, 지역 소멸, 낮은 노동 생산성. 저자는 그것들을 하나로 꿰어 “돈의 부족, 그리고 공동체 비용의 붕괴”라는 말로 정리한다. 진단은 날카롭고 설득력 있다. 그러나 놀랍지는 않다.
병원비가 두려워 아픈 것을 참고,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어서”라고 답하는 청년들, 노인이 홀로 쓰러져도 발견되지 않는 빈집들, 지방 도시의 텅 빈 상가들. 이 모든 것이 통계가 되기 전부터 이미 우리의 일상이었다.
책이 제시하는 수치들은 그 풍경에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 최저 수준의 출산율 — 이제 이 수치들은 더 이상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 그렇지”라는 한숨을 자아낼 뿐이다. 진단의 단계는 이미 끝났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처방은 오히려 더 무겁다. 증세와 재정 확대. 필요한 길이라는 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우리는 안다. 더 내야 한다는 사실은 모두 알지만, 더 내고 싶어 하는 이는 많지 않다.
여기엔 역설이 있다. 복지국가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세금을 더 내는 데에는 저항한다. 북유럽 국가들을 부러워하지만, 그들의 세율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부자들에게 더 걷어라”라고 말하지만, 내 소득이 조금 늘면 나 또한 세금을 피하고 싶어진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다. 눈앞의 손실은 크게 느껴지고, 미래의 이익은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정치의 손길은 그래서 늘 우회로를 찾는다. 간접세와 관세, 소비세라는 이름으로 부담을 흩뿌리고, 저항을 희석한다. 트럼피즘이 통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관세를 올린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 지갑에서 돈이 나간다고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물가가 오르는 고통은 애매하고 분산된다. 반면 소득세 인상은 명확하고 직접적인 타격이다. 정치가는 이 차이를 알고 있다.
결국 남는 것은 안정성에 대한 불안이다. 이미 올라간 삶의 질이 떨어질까 두려운 마음, 언제든 사회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감각. 사람들은 그 불안을 움켜쥔 채 살아간다.
이 불안은 특정 계층만의 것이 아니다. 중산층은 하층으로 떨어질까 전전긍긍하고, 청년은 애초에 중산층에 진입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는다. 노년층은 노후 빈곤을 걱정하고, 자영업자는 내일의 매출을 걱정한다. 모두가 아슬아슬한 줄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추락할 것 같은 공포.
그 불안이 풀리지 않는 한, 누구도 흔쾌히 “더 내자”고 말하지 못한다. “당신의 세금으로 모두를 구합시다”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내가 먼저 추락하고 있는데 누구를 구할 여유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다. 학원비를 더 쓰고,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부동산에 올인하고, 노후를 위해 저축한다. 개인의 선택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사회 전체로는 파국으로 향하는 길.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진다는 것을. 안전망이 사라지면 나의 안전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 — 이것이 우리가 처한 딜레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진단은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처방은 합의의 벽 앞에서 멈춘다. 사회는 이미 ‘부정’의 단계를 넘어섰다. 우리는 병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이제는 분노와 체념 사이를 오가며, 어쩌면 곧 수용으로 기울어갈지도 모른다.
퀴블러-로스의 애도 단계를 떠올린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한국 사회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을까. ‘헬조선’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은 분노였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외침.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노는 무뎌졌다. 이제 ‘헬조선’은 거의 애칭처럼 쓰인다. 자조 섞인 웃음으로 소비되는 밈.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붙는 순간, 망국론은 현실이 된다. 수용은 평화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포기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 우리는 이런 나라야. 어쩔 수 없지.” 이 문장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마저 놓아버린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 모름이 곧 나의 자리다. 답이 없는 시대에도 질문을 놓지 않는 일. “우리는 이제 죽음을 기다리는 사회가 될 것인가?”라는 물음을 붙잡고 있는 것. 그것은 절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말은 때로 가장 정직한 답이다. 쉬운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복잡한 현실을 복잡한 그대로 직시하는 것. 책은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증세하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그 합의를 이끌어낼지는 말하지 못한다. 공동체를 복원하라고 하지만, 이미 원자화된 개인들을 어떻게 다시 엮을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책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정직함일지도 모른다. 지식인의 오만함은 때로 “내가 답을 안다”고 선언하는 데서 나온다. 반면 “나도 모른다. 그러나 함께 질문하자”고 말하는 것은 겸손함이자 초대다.
그래서 시선을 개인의 삶으로 좁힌다. 거대한 구조를 바꿀 힘은 내게 없지만, 나는 나의 하루를 지킬 수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 식탁에서 대화를 나누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짐을 조금씩 덜어주는 일.
이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다. 거시적 변화와 미시적 실천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속 작은 선택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한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는 것, 지역 서점에서 책을 사는 것, 동네 식당을 이용하는 것, 아이에게 경쟁이 아닌 협력을 가르치는 것. 이 모든 것이 미약해 보이지만, 공동체의 실밥을 한 땀 한 땀 꿰매는 일이다.
책이 사회의 진단서를 내놓았다면, 나는 나의 일상 속에서 작은 진단을 내린다. 오늘도 버틸 수 있는가, 내 곁의 사람은 괜찮은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 지쳐 보이는 동료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는 것. 이것이 세상을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이 순간을 구할 수는 있다.
정치와 정책이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 살아감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냉소와 무관심으로 시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작은 연대와 돌봄으로 하루를 채울 것인가.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저항일지도 모른다.
『자살하는 대한민국』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 부재가 이 책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답이 없음을 직시하게 하고, 질문을 붙잡게 한다. 질문을 붙잡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질문하는 것은 관계를 전제한다. 나 혼자 답을 낼 수 없기에,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확장된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질문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책은 무겁다. 읽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필요하다. 너무 쉽게 수용하지 않기 위해, 너무 빨리 포기하지 않기 위해. 불편함은 아직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진단 이후의 공허 속에서, 나는 여전히 모른다고 말하며 하루를 이어간다. 어쩌면 그 “모른다”는 말 자체가, 아직 희망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모든 것을 알고 체념하는 것보다, 모르기에 계속 묻는 것이 더 나은 삶의 태도일 수 있다.
답을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불안할지라도, 질문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책을 읽은 나에게 남은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