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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아닌 마음으로 역사를 바꾸는 법
재미와 배움이 함께 온 이야기
『고종, 군밤의 왕』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정말 재미있었고, 공부도 많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체역사 웹소설의 세계에는 익숙한 공식이 있습니다. 미래를 아는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압도적인 지식과 힘으로 역사를 '올바르게' 바꾸는 통쾌한 서사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영웅담이 아닌, 한 평범한 노인의 '일상적인 시선'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에 무게를 둡니다. '대체역사'라는 장르에 '군밤'이라는 소박하고 독특한 재료를 더해,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른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줄거리 요약: 80세 군밤 장수, 왕이 되다
서울 한복판에서 군밤 노점을 하던 80세 '김귀남' 옹. 한국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그가 어느 날, 망국의 군주 '고종'의 어린 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배경은 서구 열강의 압박과 내부의 혼란으로 가득한 19세기 말 조선입니다. 주인공에게는 미래를 바꿀 압도적인 지식이나 힘이 없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80년 세월이 새겨진 단단한 삶의 태도와,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기가 막히게 군밤을 굽는 재주뿐입니다. 이 소설은 그의 작고 평범한 행동들이 어떻게 거대한 나비효과를 일으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나가는지를 그려냅니다.
인상 깊었던 지점: '평범한 시선'이 가진 힘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특별한 능력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관점'이 변화의 주축이 된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은 거창한 개혁안이나 미래 지식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굶는 백성을 보며 "이건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하고, 부당한 관습에 "왜 이래야 하지?"라고 의문을 품는 지극히 일상적인 상식으로 주변을 설득합니다. 어쩌면 그의 시선은 역사가나 정치가의 거시적 안목보다 좁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좁고 구체적인' 시선이 오히려 당대 사람들에게 와닿는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의 능력(Skill)이 아닌 태도(Attitude)가 세상을 바꾸는 첫 번째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은 큰 울림을 줍니다.
'군밤'이라는 일상적이고 친근한 소재가 조선 말기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과 만난다는 점도 매우 독창적입니다. 이 소박한 소재는 독자로 하여금 "거창한 힘이 아니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세상은 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따뜻한 희망을 품게 만듭니다.
역사관에 대한 성찰: 식민사관을 넘어서
이 작품은 단순한 대체역사물을 넘어, 우리가 한국 근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집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조선 말기를 '필연적 쇠퇴'의 시기로 학습해왔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이 심어놓은 '정체성론'의 잔재가 여전히 우리의 역사 인식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소설은 작은 변화만으로도 역사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박규수 같은 개화 지식인들의 존재, 백성들의 생명력, 그리고 적절한 시점의 작은 결단들이 모여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소설을 읽으며 박규수라는 인물을 새롭게 알게 된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실존 인물들이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선택 앞에 서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역사를 뒤트는 것을 넘어, 당시의 시대상과 외교·정치 상황, 인물에 대한 고증이 매우 세밀하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덕분에 소설을 읽는 내내 저절로 '공부된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는 단순한 역사 지식을 넘어 '진정한 리더십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주었습니다.
비평적 고찰: 우연과 행운, 그리고 인간 능력의 한계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주인공의 의도와 노력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착각물의 흔한 클리셰처럼 모든 것이 주인공의 계획대로 척척 풀리는 것도 아니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갑작스러운 신의 개입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우연과 행운의 영역이 큽니다. 주인공의 작은 선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때로는 운 좋게 위기를 넘기기도 합니다.
이는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될 여지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개인의 능력이 역사를 바꾸는 데 한계가 있음을, 결국 역사는 거대한 물질적·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역사관을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선한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시대적 조건과 무수한 우연들이 맞아떨어져야만 변화가 가능하다는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바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이런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이 오히려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노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 근대사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80세 노인의 눈으로 한국 근대사를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를 모두 겪어낸 세대입니다. 그런 그가 조선 말기로 돌아가 격변의 시대를 다시 마주할 때, 독자는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 시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역사는 단순히 승자와 패자, 옳고 그름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각자의 고민과 선택이 있었고,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그런 복잡한 역사의 결을 섬세하게 짚어냅니다.
작품 평가: 장점과 아쉬운 점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은 진중한 문체와 철저한 고증에서 나옵니다. 가볍게 휘발되지 않는 무게감 있는 서사는 독자를 19세기 말 조선의 공기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또한, 세상을 정복하려는 거대한 욕망이 없는 주인공의 설정은 '영웅'이 아닌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장점은 진입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고어체 느낌의 문장과 잦은 한자어 사용은 일부 독자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또한, 사건이 폭발적으로 전개되기보다는 서서히 쌓여가는 방식이라, 빠르고 통쾌한 액션 위주의 웹소설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느리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총평 및 추천 대상
『고종, 군밤의 왕』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평범한 사람의 일상적 시선이 어떻게 세상을 물들여 가는지를 보여주는 진중하고 따뜻한 작품입니다. 능력보다는 태도, 폭발보다는 누적, 영웅보다는 삶의 지혜에 주목한 수작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한국 근대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식민사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도 던지는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먼치킨' 대체역사물에 질린 분, 깊이 있는 서사와 철학적 메시지를 음미하고 싶은 분, '힘'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 그리고 한국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께 추천합니다. 반면 빠른 속도감과 통쾌한 '사이다'를 1순위로 원하시는 분, 고어체나 한자어가 많은 글을 읽기 힘들어하시는 분께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후기 및 부록
읽는 동안 역사 속 작은 단면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감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평범한 관점'과 '작은 행동'이 결국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냉정한 현실이 함께 마음에 남았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구한말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본다면, 작가가 숨겨놓은 복선과 인물들의 행동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즐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