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상상하는 좌표계와 안주하려는 태도에 대하여

365 Proejct (334/365)

by Jamin

다시 쓰기 001: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를 다시 쓴 의식하는 삶

다시 쓰기 002: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를 다시 쓴 철학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다시 쓰기 003: 평면이란 무엇인가 를 다시 씀


1. '완벽한 평면'이라는 유용한 거짓말


'평면'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고르게 퍼진 2차원 공간을 떠올린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완벽한 평면—마찰력이 0이거나 원자 단위의 굴곡조차 없는 면—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평면'을 두 가지 방식으로 유용하게 사용한다. 첫째, '무시할 수 있는 오차'를 가진 면을 실용적으로 평면이라 간주한다. 둘째, 수학과 물리학에서 이론 전개를 위한 '사고의 가정'으로 활용한다.


2. 존재하지 않기에 가장 유용한 것: 방향


하지만 '평면'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이상(Idea)'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엔지니어는 '완벽한 평면'을 향해 공정을 개선하고, 물리학자는 더 정밀한 측정 도구를 개발한다. 밀리미터에서 마이크로미터로, 다시 나노미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한다는 게 이상해 보이지만, 바로 그 '없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좌표계이자 방향을 제공한다. 만약 '완벽한 평면'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면, 우리는 "대충 평평하면 되지"에서 멈췄을 것이다.


3. 정의는 평면이 될 수 있는가?


이 논리를 '평등', '정의', '인권' 같은 사회적 가치로 가져와보자. 이것들 역시 '완벽한 평면'처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관측할 수도 없다는 이유로 "이상주의", "현실을 모른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평면'은 $ax + by + cz + d = 0$이라는 보편적 합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정의'는 사람마다, 사회마다 다르게 정의된다. 모두가 다르게 생각하는 '이상'이 과연 '공통의 좌표계' 역할을 할 수 있을까?


4. '좌표계'의 진짜 정체


여기서 우리는 '좌표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정의'라는 Idea는 '평면'처럼 명확한 최종 목적지를 찍어주는 고정된 좌표가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벡터(Vector)', 즉 방향성으로 기능한다. 우리는 '완벽한 정의'가 무엇인지 합의하지 못할지라도, <납골당의 어린 왕자>처럼 '세상이 원래 그런 것'과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을 구분하며, '이것은 명백히 불의하다'는 것에는 합의할 수 있다. '더 정의로운'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침반인 셈이다.


더 나아가, '좌표계'의 진짜 정체는 '온전하고 완전한 것을 상상하는 능력' 그 자체일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토론하고 "우리는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라고 합의하는 그 사회적 과정 자체가, 우리를 '약육강식'이라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게 만드는 동력이다.


'상상하는 힘'이야말로 좌표계를 생성하는 근본적인 능력이다. 이 상상이 있기에 우리는 비로소 현재 상태를 '불완전하다'고 진단하고 '더 나은 상태(To-Be)'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5. 진짜 장애물은 '불가능'이 아니다


'완벽한 평면'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완벽한 평등'도 사회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엔지니어가 나노미터에 도전하듯, '불가능'이라는 제약 자체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 핵심 원인은 아니다.

진짜 장애물은 '안주하려는 태도'다.


"이만하면 됐지", "현실이 원래 이래", "대충 평평하면 되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 'Idea'는 더 이상 좌표계로서의 힘을 잃는다. 우리는 불가능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기를, 나아가기를 스스로 멈추는 것이다. '안주'는 '세상이 원래 그런 것'(As-Is)에 '원래 그래야 하는 것'(To-Be)이라는 상상의 좌표계를 겹쳐보기를 포기하는 행위다.


6. 안주하지 않기 위하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안주하려는 태도'를 극복하고 계속해서 그 'Idea'를 좇을 수 있을까?


시동 장치로서의 '회의주의': "당연한 것에 의구심을 가지는 태도"가 필요하다. '정말 이것이 최선인가?', '이 불평등은 당연한가?'라는 질문이 '안주'의 상태를 깨뜨리는 엔진을 켠다.


방향타로서의 '철학': "이래야 한다"는 개인의 철학, 혹은 사회적 신념이 'Idea'를 향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연료로서의 '다양한 상상과 Input': '없었던 것을 상상하는 능력'은 진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과거의 엔지니어들이 0.1mm의 평면을 만들었기에, 우리는 0.01mm를 상상할 수 있다. 과거의 사상가들이 '인권'을 논했기에, 우리는 '더 나은 인권'을 상상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 다른 학문,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이 우리의 '상상'을 더 정교하게 만들고 'Idea' 자체를 진화시킨다.


7. 결론: 상상은 진화한다


'평면'을 다시 생각한다. '정의'를 다시 생각한다.


이 'Idea'들은 하늘에서 주어진 절대적인 좌표계가 아니다. 그것은 '회의주의'로 시동을 걸고, '철학'으로 방향을 잡으며, '새로운 Input'을 연료 삼아 우리가 스스로 생성하고 갱신해 나가는 '진화하는 목적지'다.


'안주하려는 태도'는 이 시스템의 엔진을 끄는 행위다. 지금 '완벽한 평면'이 없다고, 지금 '완벽한 평등'이 없다고 해서 안주해서는 안 된다. 그 'Idea'를 상상하는 힘이 있기에, 우리는 '무시할 수 있는 불평등'의 범위를 나노미터 단위로 좁혀가듯,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철학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