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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테이블에서 우리의 테이블로

365 Proejct (335/365)

by Jamin

다시 쓰기 002: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를 다시 쓴 철학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다시 쓰기 003: 평면이란 무엇인가다시 쓴 상상하는 죄표계

다시 쓰기 004: 어른, 이어폰 그리고 찻잔 을 다시 씀


부제: 신사의 찻잔에서 어른의 협상까지


‘나리타 료우고’는 『뱀프!』에서 신사란 존재를 설명하며 감정과 상황 사이에 테이블과 찻잔을 놓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이미지를 오래 붙잡았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마음속에 작은 테이블을 펼치고 감정과 마주 앉았다. 그 위에 찻잔을 두고 대화를 시도했다.


그 방법은 감정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러나 그 대화는 언제나 혼자였다. 상대는 내 안의 또 다른 목소리, 이성의 대역이었다. 나는 분노를 다스렸지만 대화의 범위는 나 자신에 머물렀다.


공론장은 본래 많은 사람이 함께 앉는 자리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광장은 수백 개의 1인용 테이블이 흩어진 풍경에 가깝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음료를 앞에 두고 자기 내면과만 이야기한다. 말은 오가지만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상대의 말은 내 해석을 거치며 변형되고 내 말은 상대의 벽에 부딪혀 멈춘다. 각자의 테이블은 자기 확신의 요새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옳음을 확인하며 고립된다.


그 벽을 허물고 싶을 때 나는 말을 바꿨다. 상대가 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친절이 아니라 오만이었다. 나는 이미 상대를 미성숙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다. 무엇이 어울릴지를 결정하기 전에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테이블의 주인이었고 상대는 내가 초대한 손님이었다. 그런 대화는 교류가 아니라 심문이었다. 설명은 일방적이었고 대화는 시작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홀로 존재하는 개체로 보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함께 존재하는 존재, ‘Mitsein’이라고 했다. 이 생각은 테이블의 의미를 바꾼다. 테이블은 대화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서로를 인식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같은 테이블에 앉을 때 비로소 자신을 확인한다. 나의 말은 너를 향할 때 의미를 얻고 너의 응답은 나를 새롭게 만든다. 대화는 나의 세계를 잠시 비워내고 그 빈자리에 타인이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관계는 그렇게 세계를 만든다.


신사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한다. 그는 품위를 유지하고 상황을 정돈한다. 그것은 자기 관리의 덕목이다. 어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의 테이블을 인정한다. 자신의 잔만이 옳지 않음을 알고 상대의 세상을 묻는다. 협상가는 두 세계 사이에 새로운 테이블을 세운다.


그는 말로 설득하지 않고 함께 앉을 자리를 마련한다. 신사는 자신을 다스리고 어른은 타인을 인정하며 협상가는 관계를 세운다. 책임은 이 마지막 단계에서 완성된다. 그것은 함께 세계를 만들어가는 능력이다.


공론장으로 돌아갈 때 필요한 것은 설득의 기술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빈손의 용기다. 빈손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확신을 잠시 내려놓는 일이다. 논리를 접고 상대의 언어를 통과해 자신을 새로 배우는 일이다. 대화는 설득의 과정이 아니라 존재의 훈련이다. ‘당신은 무엇을 마십니까?’라고 묻고 ‘나는 이것을 마십니다’라고 대답하며 ‘우리는 무엇을 함께 마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그때 세계는 다시 연결된다. 작은 테이블 위에서 인간은 신사에서 어른으로, 어른에서 협상가로 성장한다. 그 길의 시작은 언제나 빈손으로 테이블 앞에 앉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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