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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Feb 20. 2017

<컨택트> by 드니 빌뵈브

그럼에도, 살아간다.

영화 <컨택트>의 본 명칭은 <Arrival>이며, SF 소설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을 원작으로 한다. 이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정치적 올바름(Politiacally Correctness) 관련 조사를 하며 다시 마주한  '사피어-워프 가설' 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바쁜 시간을 쪼개 상영관으로 향했다.


<컨택트>는 웅장하지 않다. 최근 인기몰이를 했던 다른 SF 영화에 비해서 그 스케일이나 화면에서 보이는 색다름이 약한 편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잘 짜여있고, 사람에 대한 꽤나 따뜻한 시선이 있는 좋은 영화였다. SF적인 상상을 통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그리고 현실 국제 정세를 잘 반영한 연출은 또 생각의 영역을 확장시켜 준다. 외계 생명체를 대할 때의 각국의 공조, 그리고 그 공조의 붕괴, 중국의 비토(거부권) 행사, 미국의 따라가기 등등.



우리는 언어를 어떻게 배우는가. 내가 '언어'를 배울 시절의 기억은 이제 더는 없다. 혹은, 언어를 모르던 당시의 기억이 남지 않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언어학, 기호학 혹은 아동교육에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언어'를 배운다는 것의 개념은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과 유사하단 생각이 든다. 지금, 정리된 형태의 외국어 교습법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항해시대에 원주민을 마주친 선원들이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손짓 발짓과 음성을 섞어 노력하는 모습들, 바로 그런 모습으로 우리는 언어를 배우지 않을까. 대체로 그것은 내가 인지한 내 우방을 '모방'하면서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영화 속의 한 장면.


영화는 그런 내용을 담는다. 어느 날 지구에 나타난 UFO. 그리고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노력들. 종종 문과생을 위한 SF라는 평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 분)와 이론 물리학자 이언 도넬리(제레미 레너 분)가 이 '소통' 프로젝트를 담당하는데, 영화에서는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의 역할이 주로 조명을 받도록 연출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2005년 발표된 이영도 작가의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가 떠올랐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가 2002년에 발간되었으니 영향을 받은 것일까,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새로이 맞이한 지적 생명체와의 소통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그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는,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를 통해 생성된 생각이었고, <컨택트>를 관람하여 확장된 생각이다.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에서는, 한 외계 종족의 언어가 '화학적 기호'였고, 그 해석을 통해 지구에 재난이 닥쳤다는 내용이 초반에 언급된다. 작가의 상상에 기댄 내용이지만, '언어'라는 것이 꼭 우리가 지금 '인지'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의사소통의 수단이 꼭 말, 글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결국 언어란 무엇인가. '사피어-워프 가설' 은 이제는 꽤나 무시되는 형편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영어를 쓸 때의 성격과 한국어를 쓸 때의 내 성격은 사뭇 다를 때가 있었다. 이게 그 언어 사용 환경의 문제일까, 혹은 그 언어 자체의 문제일까, 흥미로운 고민이었다. 영화는 이 문제를,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양키들은 꿈도 영어로 꾸겠지?' 했던 것 같은 형태로 보여준다. 주인공은 외계의 언어를 배우다 못해, '외계인'의 꿈을 꾸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 꿈은 무엇일까?



아래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시간'을 다룬다. 우리는 '시간의 장인'이지만 우리가 자아내는 '시간'을 분명하게 인지하지는 못한다. 2차원과 3차원의 차이만큼이나, 3차원과 4차원에도 큰 벽이 있을진대, 우리는 그것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 같진 않다. 물론, 이건 물리학에 대해서 교양 수준으로도 배우지 못한 이의 평이다.


그런 내게 시간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준 작품이 두어 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BBC의 <닥터후> 이고, 나머지는 이영도의 <퓨쳐 워커>, <그림자 자국>이다. <닥터 후>는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 인식에 대해서 'Timey-Wimey'라는 우스꽝스러운 용어를 써가며 내게 가르쳐 주었다. <퓨쳐 워커>에서 나온 것처럼 미래는 고정되어 있다. 왜냐면 과거가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거로 흐른다. 내가 열심히 공부한 결과가 수능 점수인 것처럼, 과거와 미래는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시간은 사실 '선형적'이지 않읋 수도 있다. (이게 작품을 바로 이해한 것이라고 묻는다면, 노코멘트)


<그림자 자국>에서 주인공 격인 등장인물 '예언자'는 '예언'을 '미래에 대한 강간'이라고 표현한다. 약간 슈레딩거가 떠오르기도 한다. 관측된 미래는 고정된 것. 때문에 '예언'은 자기 삶에 대한 '스포일러'이다. 정해지지 않은 '예언'이라면 예언이라 칭하면 안 되는 것이고, '정해진 예언'이라면, 어차피 그렇게 정해져 있기에 딱히 쓸모가 없다. 다시, 우리의 과거가 고정되어 있기에,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닥터 후>에서 한마디, "Time can be re-rewrriten" "Don't you dare"


<닥터후> 의 한 장면


영화 <컨택트>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방법은 '햅타포드(작중 외계인의 명칭, 7개의 발이 달려 있다고 명명함)'의 언어를 익히는 것이다. 때문에, 루이스 뱅크스가 꿈을 통해서 영화의 처음과 이어지는 - 예언적인 꿈을 꾸는 것은 시간을 현생 인류보다 더 넓게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능력에 대해서 'Weapon'이라고 번역되었고, 이에 흥분한 인류가 헵타 포드를 공격하는 장면은 꽤나 웃기고, 슬프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은 본디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질 수도 있는 존재이니까. 어쩌면 그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직 겪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떠올려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다가오는 미래, 더 넓은 우주로 향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햅타포드는 인류에게 살라고, 살아남아서 언젠가 자기들에게도 도움을 달라고 '시간'을 보는 능력을 루이스 뱅크스에게 주었을 수도 있다. 그녀는 '햅타포드'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책을 쓰면서, 그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다.


중국 장군 부인의 유언을 미래에서 듣고, 현실에서 반영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가 결정되기 위해서는 과거가 고정되어야 하니까. 현재에 닻을 내린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 루이스는 본인이 시간을 벗어나 - 우리가 평면도를 통해서 2차원 세계를 보는 것처럼 - 본인의 삶을 관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강간당해 버렸다. 정해진 미래를 본 것이다. 그녀는 질문하려 한다. 그럼에도 그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녀는 선택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는 슬픔까지도 모두 포용하려 한다. 그래도 살아간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언 도넬리는 떠날 수밖에 없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다시, 이영도 작가의 <퓨쳐 워커>가 떠오른다. 작중 등장인물 '미'는 '예언자'이며 자신의 비참한 생 까지도 모두, 알고 있는 존재이다. 때문에 가끔 그녀는 헷갈릴 때도 있다. 사랑해서, 이 사람을 만난 것인지, 내가 본 미래에 그가 있어서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퓨쳐 워커'란, 미래를 걷는 자를 뜻한다. '미'는 본인의 삶을 먼저 걸어 버려서, 재미없는 - 어쩌면 비참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작품 말미에, 등장인물 '챙' 은 '미'에게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시간을 가진다.(이 괴상한 이름의 사내가 언급한 '미'의 미래의 '그' 다.) 걷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모두 - 그 행동의 모든 이유는 그가 사랑하는 '미'에게 가 있었다. 때문에 '미'의 존재 이유는 '챙'이 되었고 '챙'의 존재의 근거가 '미'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루이스는 미래와 과거를 함께 인지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람은 현재를 살아가면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다. (물리학적으로는 아무런 쓸데가 없는 표현이다) 충실한 오늘만이, 어제와 내일을 있게 만든다. 적어도 본인의 삶 속에서는 그렇다. 그러니 그 현재를 누군가와 충실히 나눌 수 있다면, 어쩌면 그 끝을 알고 있다고 해도 즐거우리라. 어차피 캡틴 아메리카가, 아이언맨이 이길 것을 뻔히 알고 있다고 해서 마블 영화가 재미없는 건 아니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오늘로 누군가의 내일을 살 수 있을 만큼, 내 현재를 온전히 보낼 무언가를 찾아야만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게 꿈이거나, 연인이거나, 무엇이더라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영화를 본 후 게으름에 빠져 리뷰를 한동안 미뤄두고 있었더니, 기억도 가물가물 하고 그래서인지 글도 들쭉날쭉이다. 한 가지 확실한 기억은, 영화는 그럼에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고 - 그 기쁨도 슬픔도 모두 루이스의 것임을 분명히 밝혔던 것 같다. 그게 너무 눈부셔서 - 인터스텔라가 보여준 엄청난 화면 따위는 모두 잊어버리고 나는 이 영화가 2010년 이후 본 SF 영화 중 최고라고 뽑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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