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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Feb 24. 2017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by 리처드 탈러

경제학원론 교수님 전상서

이 글은 아래 링크의 책을 읽고 남기는 '독후감' 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DGT00028537272YE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40만 한국 독자의 열광, 《넛지》이후 7년 만의 신작!포브스 / 이코노미스트 / 파이낸셜타임스 & 매킨지 / Inc. 선정“이 책이야말로 올해 최고의 비즈니스북이다!”행동 경제학을 발전시키고 넛지를 만들어내기까지, 리처드 탈러의 흥미진진한 히스토리! 일상과 비즈니스 문제를 해결하는 행동 경제학만의 기발한 해법!“길거리 남성 정장은 왜 항상 세일 중인가? 메이시 백화점의 쿠폰 없는, 정직한 가격 정책은 왜 실패했을까? GM의 재고정책과 행동 경제학이 만난 결과는? 그릭픽 리조트의 매출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행동심리를 이용했나? 우버 택시의 성공 비결? 퍼스트 시카고 은행이 고작 ‘3달러’ 때문에 온갖 비난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정경제와 공공정책에 넛지를 활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은?”세계 최고의 행동 경제학자이자 [넛지]의 저자, 리처드 탈러는 이 같은 문제를 어떻게 탐구하고 해결했을까? 인간의 불완전한 허점을 공략하라! 탈러는 [넛지]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이번 신작을 통해 인간의 만족감을 높이면서 동시에 문제를 해결하는, 행동 경제학만의 기발한 해법들을 내놓았다. 경제학의 중심에 이성적 ‘이콘’이 아닌 예측불허한 진짜 ‘인간’을 놓았을 때 함께 윈윈할 수 있는 유용한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쿠폰과 세일 광고 앞에서 변심하고, 이성과 합리주의라는 계산기를 두드려놓고도 결정의 순간 뜻밖의 선택을 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세계적인 심리학자나 경제학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0년 어느 날, 리처드 탈러는 여기에 의문을 갖는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가?” 탈러는 ‘잘못된 행동’을 리스트로 만들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성과 비이성이 뒤얽힌 인간의 특성에 주목해 행동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발전시켜 나간다. 대니얼 카너먼, 아모스 트버스키 등 행동주의 대가들과 교류하고, 역사 속에 살아숨쉬는 전통 경제학자들과 치열한 격전을 펼친다. 또한 가계 관리부터 우버 같은 신사업에 이르기까지 행동주의 관점과 통찰로 일상과 비즈니스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간다. 행동 경제학을 연구하고 이를 현실에 적용해 새로운 해법을 찾아가는 소설 같은 히스토리를 따라가다보면, 저절로 행동주의의 해법과 넛지의 기초를 체득할 수 있다.

book.daum.net

 


나는 <넛지>에 대한 추천을 받고 읽지 않았다. 행동경제학에 관련된 책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람들이 '넛지' 가 중요하다고 하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나는 대체로 삶에서 사유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수긍하고, 암기하는 인간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태도는 대체로 중등교육시기에 주입되고, 지금은 고등교육에서도 그 경향을 유지하게 만드는 장치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사람들은 걱정한다. 뭐, 그런가 보다 했다. 질문하지 못하는 기자에 대한 비판 사설이 등장할 때도, 솔직히 뭐 질문하는 거 좀 무서울 수도 있지 뭘 이라고 생각도 했다.


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돌이켜보니, 내가 왜 이렇게 '경제학' 도서를 기피하고, 읽다가 잠이 들고, 독하게 읽어도 반절도 이해를 못하는 까닭을 여기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왜'라는 질문을 경제학 원론 시간에 던지질 못했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로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의 독후감을 갈음해보려고 한다.



교수님. 안녕하셨나요. 날이 많이 춥습니다. 건강하신지요?


그때가 떠오르네요. 2006년의 어느 날이었죠. 막 대학생이 된 저는, 그러고 새내기 생활 중 절반을 보낸 저는 뭔지 모를 허무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잘 풀리지 않은 연애 탓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지금 뭘 배우고 있는지 모르겠는 감정 탓이었는지 처음 하는 타향살이에 지친 탓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감정이 없이, 필수 수업이기에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고, <맨큐의 경제학> 이 비싸고, 무겁다는 투덜거림만 늘었었습니다. 


교수님.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이라는 책에서 저는 '이콘'이라는 개념을 접했습니다. 어쩌면 이건 제가 배웠던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경제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님, 저는 저자가 이것을 지적하기도 전에 이게 무슨 개소리 Bull shit 냐고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굳이 영어로 한 마디 더한 것은 그때의 감정을 잘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에 개소리라고 여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케이스가 있긴 하던데?라는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교육 프로그램 발표를 마치고 저는 왜 생각이 말랑말랑하지 않냐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내가 그랬나? 지금은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생각이 굳어가고 있고, 어쩌면 신입으로 회사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창업 비슷한 것을 하면서 제 두뇌의 경화는 진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죠. 하지만 돌이켜보면 제가 제 전공과 관련된 수업들을 듣기 시작한, 네, 바로 교수님 수업을 듣는 시점부터 뭔가 그랬던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 이것은 교수님을 비난하고 비판하기 위한 편지가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다만, 그때의 기억과 지금 제가 읽은 책을 교차로 놓고 나라는 새끼는 왜 이것밖에 성장하지 못했나 하는 '자아비판'을 위한 편지입니다. 그것을 굳이 교수님을 향한 편지 형식으로 쓰는 것은 그것이 조금 더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교수님이지만, 명확한 대상이 정해지면, 제 사고를 정리하고 표현하기 쉽기 때문이죠. 왜,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페르소나가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수님은 어쩌면 굳어가는 제 뇌를 다시 연화하기 위해 넘어야 할, 평생의 숙적  Main Villian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가치판단의 영역은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가지는 신적 대응물 로의 감정을 뛰어넘어야 본인을 자각하고, 성장하여 어른이 되듯이, 제 기억에 고정된 교수님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저는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써 봅니다.


다시, 교수님, 저는 이콘 Econ 이 아닙니다. 왜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이제 이걸 반복해서 타이핑하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바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추후 <책> 이라고만 표시하겠습니다.)에서 나온 '마시멜로 실험'에서 기다리지 못하는 아이여서일까요? 물론, 저는 자제력이 없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경제학적 사고를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적 행동을 방해하는 요인일 수는 있겠네요, 네. 저는 두 번째 마시멜로도 먹고 싶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첫 번째 마시멜로도 먹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건, 맛있잖아요. 


교수님. 전 아직도 '몬티홀 문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그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며, 따라서 교수님과 제가 공유해야 할 어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에서 멀어지는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왜 궁금해해야 하는지부터, 사실은 별로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 업계, 아니 사실 지금의 직장인들은 모두 합리적 사실에 기반한 의사결정 Data driven decision making을 강조하지만, 저는 전근대적인 직관에 의한 판단에 마음의 무게추를 더 두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실, 확률론에 대해서는 그래도 다른 수학 분야 중에서는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였던 사람입니다. <수학의 정석>을 남들처럼 '집합' 부분만 팠던 사람이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모의고사에서 수학 성적이 5~60점대로 나온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확률 쪽에서는 남들에 비견할 만한 성적을 거두긴 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나오는 문제들 대다수는 그 당시 배웠던 확률에 대한 지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 법한 문제이지요. 


그런데 교수님,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식을 쌓았던 기억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도 멍청한 선택을 하고야 말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다시, 제 마음속의 저울에는 여전히 '감정' '직관'이라는 추가 더 무겁다는 것이지요. 


<책>에서 저는, 저자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위안을 받았습니다. 굉장히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저랑 그리 다르지 않은 결론을 내릴 때가 많더군요. 왜인지는 <책>을 보면 여러 가지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제가 '행동경제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인간의 행동을 '증거'로 삼은 경제학이라는 것뿐입니다. 기존의 경제학 조류가 연역적인 방법이라면, 행동경제학은 그 근원을 귀납적인 방법에 조금 더 두고 있다는 차이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교수님. 이 편지가 닿을지는 모르지만, 최근 제 판단에는 이게 '경제학' 적 사유 주제라고 생각하는 고민이 하나 있어 그 고민을 전하며 이 편지에 그나마 '주제'를 담아 보고자 합니다. 경제학적으로, '주제' 따위도 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는 노동을 하고, 다음 서버의 데이터를 낭비하는 것은 아무래도 '경영학'을 전공한 한때 '이콘' 지망생으로의 윤리관이 허용치를 않네요. 허섭스레기처럼 보이겠지만, 읽으신다면 부디 관심을 가지고 아래 문제에 대한 의견을 같이 고민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시발 비용 Fuck you money'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못 들어보셨나요? 그렇다면 교수님은 훌륭하게 퍼거슨 경의 승리에 일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퍼거슨 경이 말하길,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하셨지요. 경제학 교수님이 그런 '비경제학적' 인 행동을 하시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테니, 어쩌면 이건 직업윤리와도 관련된 행동일 수도 있겠네요. (물론 이건 퍼거슨 경의 선언이 참,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최근의 많은 사례들은 퍼거슨 경의 혜안에 대해 감탄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저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트위터의 현자 오월암님.



물론 위 사진에서 보듯이 진흙 속에서도 연꽃은 피고 있습니다. 교수님,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저는 저 시발 비용에 대한 고전 경제학적, 노동 경제학적 그리고 행동 경제학적 설명을 듣고 싶어 졌습니다. 하지만 무릇 학문이란 시대의 조류에 한걸음 뒤쳐져 따라올 때도 있으니, 현재 상태로는 홀로 고민할 수밖에 없더군요.


처음 시발 비용을 언급하며, 단 링크의 글(허핑턴포스트, '퍽유 머니'와 '시발 비용'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 박세회 : 스크롤을 다시 위로 올리시는 낭비를 막기 위해 다시 링크를 달았습니다.)에서는 이런 글들이 있더군요.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시발 비용에 대해 "지속된 경기불황과 불안정한 시국으로 개인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서 소소한 소비문화 확산으로 이어진 것 같다"라고 해석했다. 퍽유 머니에 대한 타임지의 해석과 시발 비용에 대한 이 교수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경기가 호황일 때 우리는 퍽유 머니를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경기가 불황일 때는 시발 비용을 지출해가며 스트레스와 싸운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저는 이 해석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시발 비용'의 핵심은 우리는 우리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에는 경제학적 가치가 있다는 점이지요. 법원에서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금을 정하듯,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그래,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고도로 데이터화 되어가고 있는 21세기! (네, 교수님, 우리가 20세기 중반부터 그렇게 바라 왔던 신세계에 우리는 와 있습니다!) 라면, 이 데이터를 모아서 우리 사회의 스트레스와 거기에 수반하는 비용, 거기에 연관된 산업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트위터에 등장하는 '시발'의 빈도수와 그 날의 소주 소비량은 과연 상관관계를 보일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과 이 '시발 비용'은 연관이 됩니다. 저는 이 '시발' 상황 때문에 자주 '이콘'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소비를 정당화시키곤 합니다. 보통은 이런 물건을 사는 것이지요. 남에게 선물을 할 수는 있지만 나는 사지 못하는 물건들. (이것도 경제학적 관점이든 뭐든 재미있는 주제일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주는 선물로는 그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나를 위해서는 쓸 수 없는 이것. 이건 어쩌면 자기 절제라는 코르셋 속에 사는 현대인이기에 발생하는 현상일 수도 있겠지요. 그럼 이것을 해제하는 것이 '시발' 상황이라는 것인데, 중요한 건, 네 교수님 죄송합니다. 또 제가 잠깐 밖으로 나갔네요. 저 '시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빡침'의 상태에 하는 구매 행위와 그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 딱 이 정도인 것입니다. 시발, 실제 택배 박스 안에 벽돌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면 그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수님, 제가 부적절한 발언을 한 점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사는 물건의 가치가 우리의 스트레스와 바로 등가교환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택배 박스이지, 그 안의 내용물이 아닐 때가 많으니까요. 어쩌면 그 안의 물건을 보고 받는 '시발' 이 우리가 구매를 결정할 때의 '시발' 보다 낮기만 하면 되는 것이겠죠. 그리고, 보통 그 반대 경우는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는 있지만 내가 사기에는 부담되는 - 길티 플레져 같은 것들은 보통은 사실 제 값어치를 하는 것들이거든요. - 그걸 사지 못하는 것은 '이건 내 경제 수준에는 이건 합당치 않아'라는 코르셋의 산물일 테니까요. 


한 가지, 의구심이 듭니다. <책>에서 저자가 말하듯, '넛지' 가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도덕적으로요, 네. 그건 어쩌면 세뇌 Brainwashing 이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저자를 개입 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인간을 더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더 우아하게 만드는 방법과 함께 발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의구심은 음모론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경기의 침체는 소비 시장의 경직을 야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적절한 수준의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능성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런 자극이 개개인의 수준으로 쏟아진다면, 말이죠. 


알파고가 있었습니다. 알파고 모먼트는 AI에 대한 큰 기대감과, 그리고 이어지는 빠른 실망으로 이어졌지만 어디선가는 그 사건을 기반으로 더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돈이 되기에 연구하는 기술 기업 Tech Giants 도 있습니다. 요즘 인공지능, 자율주행 자동차, 소매시장 retail 등등을 보고 있는데요, 어쨌든 여기에는 알고리즘이 들어가고, 인간 수준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가능한 자율적으로 판단을 내려 움직이는 기계들이 우리의 삶 속에 퍼지게 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 되어 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리 카플란 아저씨는 <인간은 필요 없다>라는 자극적인 책 제목을 뽑아내기도 했죠. (사실, 이건 번역한 출판사의 결정이었겠지만, 뭐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경제주체에 '알고리즘'을 넣어야 할 때가 다가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 경제주체는 교수님이 가르친 <맨큐의 경제학> 정도는 가볍게 이해하는, 그야말로 경제학적 인간인 Econ 의 순수한 이데아적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그 '존재'는 인간을 데이터를 기반으로 꽤나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수한 데이터를 쏟아내야만 하고, 그리고 이것을 기계들은 수집하고, 처리하고, 가공하여, 의미를 뽑아낼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존재'는 '넛지'를 언젠가 배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페이스북이 영국인지 어딘지에서 실험한 것처럼, 페이스북에 노출되는 콘텐츠의 성향으로, 그 사람의 기분이 바뀌는지를 보았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의 미래 세계는 그런 '넛지'를 더 쉽게 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니콜라스 카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유리 감옥> 속에 살게 될 것이니까요. 


여기서 다시 음모론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기계가 과연 경기 침체기에 어떠한 경제학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것인가? 그 기계가 '시발 비용'의 원리에 대해서 인지하고, 그것과 다른 해결책 간의 이익 교량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어쩌면 그 기계가 우리에게 '넛지' 하는 스트레스들을 개개인의 인간이 인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원인을 본인의 상사나, 본인의 통장 상태나, 본인의 태생 - 집안이나 나라 - 등에게 돌리는 것이 더 쉽고 명확하고 직관적인 결론이 되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좀 정리가 되는 느낌입니다. 교수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콘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기존의 경제학이 이끈 우리의 밝은 현재는 그것을 찬사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가상의 모델 속의 사고 실험, 수학적인 공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시스템'은 자본주의 종교의 '성전'이었고, 그것을 무시하는 개개인은 너무도 무지몽매한 개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도 당연히 알고 계시듯이 인간은 경제학적인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그들의 군집체인 사회는 경제학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을 가질 수는 있어도 절대로 경제학적인 동물이 될 수 없습니다. 또라이 일정 성분 비의 법칙은 어디에나 있고, 그 또라이는 가끔은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되기도 합니다. 그 특이함 irregular는 때로는 사람을 '넛지' 하는 힘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교수님. 제가 하고픈 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때, 이 이야기의 1/10밖에 안 되는 논리라도(이 글에도 논리가 거의 없는데 이 1/10 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죠) 꺼내어 말했어야 합니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저는 교수님의 후광과 지적인 수준에 감탄을 하며 졸기에 바빴지, 이런 생각을 하고, 꺼내들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딴 실험적이고 괴상하고 무척 잘해야 이그노벨상 후보에나 끼면 좋을 법한 연구 주제는 논문 주제로 검토하기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며, 당연히 그렇기에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한 경제학 입문 수업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라고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는 왜 경제학을 배우는가? 경제학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었는가? 경제학의 역사가 아니라, 경제학이 이뤄낸 성전을 한번 돌아보고, 그 성전에 난 구멍들을 보고 그리고 이것을 메우기 위해서, 더 찬란한 인류의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우리는 이것을 배운다!라는 가르침을 내려 주셨다면 저는 혹시.. 네, 아닙니다. 그걸 들을 시간에 전 숙취와 싸우며 자고 있기 바쁘긴 했었겠지요. 뭐, 그냥 그런 생각이 지금에야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돌이켜보니 좋은 학창 시절이었습니다. 수천에 가까운 돈을 투자한 것 치고 제가 경제학적으로 얻어낸 것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미래 기대수익을 위한 일거리를 제공해준 것에 학위증이 얼마만큼의 역할을 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죠. 교수님, 저는 발칙하게도 졸업생의 신입생을 위한 도서 추천에 <헌터 x헌터>라는 만화책을 추천했습니다. 몇 가지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배움은 교과서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길가다 세 사람을 만나면 세 명의 스승을 만나리라 같은 고승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대체로 한 번 뿐일 대학 생활을 조금 더 즐기라는 의미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만화책의 1권에 나오는 질문 - 가치관에 대한 질문 - 에 대해 고민해보고, 앞으로 그런 '가치판단'을 조금 더 고민해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물에 빠진 내 피앙세를 구할 것인가, 나의 어머니를 구할 것인가? 이걸 수식화 할 수 있으면 참 편하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절대 '기계'를 이길 수 없겠죠.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교수님. 8년여에 걸쳐 졸업을 했지만 저는, 경영학도 경제학도 그 그림자만 보고 실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암기만 했었던 것이고,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님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문하지 않았던 나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고, 게으른 내 천성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불필요하게 (그러니까 비경제학적으로) 긴 글을 쓰고 나니 뭔가 좀 해소되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교수님을 다시 만날 기회는 없지만, 이렇게 가상으로나마 제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구나, 하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바람이 매우 찹니다. 보중 하십시오.

불민한 제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경제학 입문 C+ 수강자 배상. 




내가 무엇을 쓴 것인지 잘 모르겠다.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을 읽으며 들었던 헛소리들을 모두 풀어냈을 뿐. 


아마 또 한동안 공부 좀 해보겠다고 산(네이버인가에 서 내놓은 기획자를 위한 추천 도서에 있었던) <행동경제학> 책을 꺼낼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미 읽어야 할 책도 너무나 많이 쌓여 있으니까. 


책이 뭘 의도한 것일까. '행동경제학'의 탄생의 흐름을 좇으면서 내게 전해주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그냥, 난 <이코노미스트> 독자들도 별 수 없는 등신들익...아니 인간이구나 하는 위안을 얻었으니 충분한 것 같다.


한 3일을 괴롭힌 책을 이걸로 끝냈으니 이 또한 충분하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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