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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을 이어 쓰기 004 : 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를 이어쓰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은 필연적으로 "무엇이 비인간적인가"에 대한 정의를 수반한다. 우리는 흔히 고문, 학살, 조직적인 혐오 범죄와 같은 극단적 폭력을 목격할 때 이를 '짐승만도 못하다'거나 '악마적이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짐승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살상은 할지언정, 이념이나 쾌락을 위해 시스템을 구축하여 동족을 대량 학살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비인간적'이라고 지탄받는 행위들조차 역설적으로 인간 고유의 특성인 고도의 지성, 상상력, 그리고 사회적 조직력을 방증한다. 악행은 본능의 영역이 아니라 의도와 계획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파괴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며, 추상적인 개념을 위해 타자를 배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답다'는 명제는 선천적인 도덕적 무결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보유한 거대하고 파괴적인 능력을 인지하고, 이를 '어떻게 통제하고 윤리적으로 다루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악을 행할 능력이 없는 존재가 선한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선택하는 존재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이다.
"금지되는 대상은 기본적으로 실현 가능한 행위이다."
이러한 통찰은 법과 규범의 본질을 관통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행위, 예컨대 '보조 장치 없는 비행'이나 '시간 역행'은 법적 금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반면 '살인', '절도', '폭력'이 엄격히 금지된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너무나 손쉽고 유혹적인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드론 기술의 발달과 동시에 비행 금지 구역이 설정되고, AI 기술의 도래와 함께 윤리 가이드라인이 제정되는 현상은, 인간의 능력이 확장되는 경계선마다 새로운 금지의 선이 그어짐을 시사한다.
모든 금지 조항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의 영토 위에 설정된 경계석이다. 기술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이에 비례하여 '해서는 안 되는 일'의 목록 또한 정교해진다.
따라서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란 단순히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과시하는 기술적 성취의 총합이 아니다. 문명의 척도는 구성원들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존엄은 무한한 자유의 방임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녕과 타인의 권리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절제'라는 사회적 계약 위에 존립한다.
이러한 추상적 논리는 '직장'이라는 현대의 조직 사회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현실로 발현된다. 직장은 단순한 노동의 현장을 넘어, 고도의 문명화된 행위가 요구되는 공간이다.
조직 내에서 "바람직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욕망과 충동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수면욕, 식욕과 같은 생리적 욕구는 물론, 순간적인 분노나 타인에 대한 호불호와 같은 감정적 충동을 스스로 통제하고 공적인 자아 뒤로 배제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이는 심리학적 용어로 '페르소나(Persona)', 즉 사회적 가면을 쓰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근태 관리 시스템, 성과 지표, 그리고 직급 체계는 개인을 '예측 가능한 존재', '감정을 절제하는 합리적 행위자'로 정형화한다. 개인은 출근과 동시에 자연인으로서의 날것 그대로의 자아를 유보하고, 사회적 직함이라는 외피를 입는다.
이러한 과정은 일견 개인의 고유성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기제로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가면'은 구성원들을 상호 간의 무방비한 감정적 폭발로부터 보호하는 완충재 역할을 한다. 모두가 자신의 기분대로 행동한다면 협업은 불가능하다. 효율성이라는 목적 하에 개별성은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조정되지만, 바로 그 덕분에 우리는 타인과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존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규범이 개인을 길들이는 억압 기제인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을 수호하는 품위의 장치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물론 조직의 논리에 매몰되어 개인의 양심과 인간성마저 상실한 맹목적인 순응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악의 평범성'이 경고하듯, 시스템에 대한 무비판적 복종은 거대한 악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차원에서 규범을 준수하고 예의를 갖추는 행위를 단순히 시스템에 대한 피동적 굴복으로 폄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본능적 충동을 억제하고, 정해진 규율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는 것은 칸트가 말한 '자율(Autonomy)'의 실현에 가깝다. 외부의 강압이 아닌 이성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동물이 가질 수 없는 고귀한 능력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추고, 견뎌야 할 때 견디는 것은 본능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이성이 본능을 통제해 낸 '주체적 승리'의 증거이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다움은 원초적 충동의 즉각적 발현이 아니라,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 그 충동을 다스리기로 선택한 자유의지에 기반한다.
결국 인간다운 삶이란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비판적 이성을 유지하면서도, 타인에게 위해가 되지 않도록 내면의 야성을 끊임없이 조율하는 위태로운 균형 잡기이다.
매일 아침, 개인적 호불호와 권태, 그리고 육체적 피로를 극복하고 정해진 시간에 자신의 자리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현대인은 단순히 경제적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매 순간 자신에게 내재된 '파괴적 가능성'과 '무질서의 가능성'을 스스로 봉인하고, 문명인으로서의 하루를 영위하겠다는 윤리적 결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소리를 지르는 대신 침묵을 선택하고, 태만하고 싶은 유혹 대신 책임을 선택하는 그 고요하고 반복적인 절제의 과정이야말로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둥이다. 우리는 그 지루한 일상의 수행을 통해 비로소 존엄한 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