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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Mar 29. 2017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에겐 없다.  

Amazon-trix & Redpill

아래 세 아티클을 읽고, 기업 '아마존 Amazon'의 예측 배송, 대시 버튼, 알렉사 등에 대한 생각을 싸질러 보았습니다.


https://www.highly.co/hl/KDhe3eN5PHkUEe

https://www.highly.co/hl/U4HkOnsQZRGoFz

https://www.highly.co/hl/APmnlFbCjCOiUR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자기 객관화란 평생을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자신을 관찰하는 시점에서 이미 편견은 개입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정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에 대한 정보는 '나'와 다른 것들, 다른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에 현생 인류의 인지능력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인간의 몸, 심리상태 같은 경우에는 전문 지식의 영역이니, 뭐.


때문에 가끔은 나에 대한 막대한 데이터를 가진 무언가가 나를 더 잘 안다. 나보다도. 미국 대형 마트 타겟에서 임신한 사실을 모르는 이에게 임신 관련 물품을 추천해준 타겟 마케팅 케이스 (그러나 실패한 감성 마케팅) 은 유명하다. 페이스북 좋아요를 가지고 만든 캠브릿지의 Apply Magic Source는, 꽤나 정확해 보인다. 어쩌면 자신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나'의 총체보다는 '나'에 대한 '정보'의 집합이 보다 더 '진여(眞如)'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혹은, 아예 '나'라는 것은 '나'에 관한 정보의 덩어리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윗 두 문단을 종합하면 소위 GAFA(Google Apple Facebook Amazon)이라 불리는 기업들은 나를 나 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구글은 검색기록으로 내 관심사를 나보다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애플은 내 핸드폰의 기록으로 내가 3시간 뒤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페이스북은 내가 좋아하는 이성의 타입을 내가 좋아한 연예인을 바탕으로 유추해볼 수 있겠지.


그리고 아마존은. 한국에 아마존이 정식으로 마켓플레이스를 론칭했다고 가정하고, 내가 헤비 유저라고 가정한다면, 나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빨래를 얼마나 자주 하는지. (세제 주문량) 어떤 영화, 음악을 좋아하는지(아마존 프라임/무비).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는지, 다른 걸 먹는지. 복싱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나라는 퍼소나를 구축할 것이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는 이론이 있다. 차라리 가짜 같은 것, 차라리 진짜 같은 것이 낫지 어중간한 레벨에서는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십수 년 전의 3D 캐릭터를 지금 보면 느껴지는 이질감이 바로 그것이다. 이건, 동족을 찾아내어 호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족 혐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끔찍하게 닮은 것들을 혐오할 수도 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무서울 때. 너무나 사람 같은 인형을 보면서. 혹은 소름 끼치게 나와 같은 특성을 지는 다른 사람을 보며. 존재감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는 걸까? 영화에서는 사이코패스끼리 서로 인정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기도 하더라.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외부에서 비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내 내면이 드러나는 것도 싫고, 존재감에도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는 것들.


우리는 GAFA에게 개인정보를 넘겼지만, 그 위험성을 충분히 자각하고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빅 브라더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수년 전부터 줄기차게 나오고 있다. 권력의 입장에서 그들이 가진 정보들이 패권을 형성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정치 공학적, 파워 게임을 분석할 때에는 무한히 증식하는 - 네트워크 이펙트를 충분히 누리는 '정보 권력'의 대두는 새로운 절대 권력의 등장일 수 있으며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분석이 없더라도, 나는 나를 충분히 잘 아는 내가 잘 모르겠는 GAFA들이 두려울 때가 있다. Boom! 이럴 때 알렉사가 등장한다. 구글 홈일 수도 있고, 시리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더 친절하게 느끼는 여성의 목소리를 탑재하고, 언제나 내 편이 돼줄 것 마냥 상냥하다. 실체 없는 정보를 '인격체'에 상당하는 무언가로 치환하여, 사람들의 공포를 붙잡아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도는 중요치 않다. 알렉사가 침투하게 되면서 예측 배송이 무섭다 (Freaky)고 한다거나, 구글이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여행지를 맞춘다고나, 애플이 내가 실행시켜야 할 앱을 골라 주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어떤 캐릭터 앞에 희석이 된다.


그렇게 GAFA는, 아마존은 어디에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를 혹은 '너'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단수가 아니다. 회사에서의 '나'와 독서모임에서의 '나'는 다르고, 속마음과 겉마음이 다를 때도 많다. 또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 내가 보는 '너'는 십수 년을 함께 사아도 잘 모른다는 부부의 마음처럼, 에반게리온이 그렇게 우려먹은 AT 필드 같은 울타리 속에 갇혀 있다.


영화 <컨택트 Arrival> 에선, 인간이 '시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묘사한다. 사람은 벡터(Vector)다라고 했을 때에, 그 변화의 방향과 빠르기. 우리는 그걸 알 수 있을까?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가 나온 것은 반대로 우리는 그렇게 시공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시간 자체도 정보이며, 시간의 흐름 속에 녹아든 변화도 정보이다. 우리는 이 정보를 확인할 수가 없다. 적어도 지금은.


통계적으로, 정규 분포 상에 오차 범위 내에, 우리의 삶은 존재한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되뇌면서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는 축구에서 메시처럼 볼을 찰 수도 없고, 스테판 커리처럼 농구를 할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으며, 아마존이 이룩할 아름다운 세상(Amazon-trix)에서 네오처럼 그 세상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 오만이다.


또한 우리는 종(Bell shaped-graph, 정규분포) 안에 있기에 - 우리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모은 아마존의 선택이 우리보다 더 우리를 위한 것일 수 있음을 '자각' 해야 한다. 난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아마존이 세제를 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야지만 다음 빨래를 할 때에, 아 그때 주문할걸 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근데 어쨌든 세상에는 호날두도 있고, 박인비도 있다. 김연아도 나오고, 류현진도 나온다. 우리는 종(Bell)을 깨부수면서 여기까지 왔다. 블랙스완은 맨날 우리를 괴롭혔고, 마틴 루터 킹은 꿈을 꾸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송곳이 된다. 주머니를 뚫고 통념에게 칼을 휘두르는 사람인 분명 나타난다. 언제나 예외처리는 기획자들을 괴롭힌다. 누군가는 바지를 입은 채로 다림질을 하고, 왜 이 경고를 하지 않았냐며 고소를 한다.


사람들은 모여서 보면 같아 보이지만(Peole) 때어 놓으면 또 다르기 그지없다. (Person) 인간(人間) 은, 호모 사피엔스는 예측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면 진화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마존이 만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멋진 신세계 속에서 인류는 새장 속에 갇히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존-트릭스 안에서, 어쩌면 주체성을 가진 사람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새장 속의 새가 새장 밖의 새 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하지만 가능성을 거세당한 종(Species)은, 현상 유지 외에 선택지가 없다.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우리는 미래를 강간당하고 있는 것일까? 급진적인 추정과, 망상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디자인하고 있고, 대시 버튼도 알렉사도 사람의 작품이다. 인공지능은 여전히 '인공'이다. 일론 머스크는 AI와 사람이 함께 가는 방향으로 대안을 제시해보려 하고 있으며, Open AI를 설립하여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근데, 그것 만으로 충분할까?




영화 <메트릭스>를 떠올려본다. 네오가 각성하기 위해서는 '트리니티'의 선택이 필요했지만, 그 이전에 '빨간약'을 먹어야만 했다. 빨간약은, 현실 세계를 '똑바로' 보기 위한 장치이다. 실제로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를 이어주는 닻(Anchor)의 역할을 하여, 가상의 네오를 현실로 불러오기 위한 역할을 수행했다.


상술한 과격한 상상을 접어 두자.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은 그 자체로도 또한 가능성의 말소를 의미한다. 아마존의 만들어나가는, 구글과 애플이, 페이스북이 만들 미래는 어쨌든 선의로 구성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보자. 하지만 그것이 특정 기업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수십 년간 믿어온 것들에 대해서 의심을 해보자. 이게 최선인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대안은 이것밖에 없는 건가? 예상 가능한 리스크는? 그것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은 무엇일까? 자본주의는 악인가? 기본소득은 만병통치 제일까? 민족주의는 이제 그 역할을 다한 것인가. 공산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념일까. 사람은 합리적인가, 또 이기적인가? 당연함에 짱돌을 날려야 할 때가 되었다.


사실, 진짜 세계(Real wolrd)야 말로 허상이다. 우리의 진실은 우리가 택한 곳에 존재한다. 우리가 빨간 약을 먹는다는 건, 우리에게 선택권이 남아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미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지만, 주사위가 던져지지는 않았다. 피터 틸이 <제로 투 원>에서 역설한 것처럼,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반기를 들어야만 한다. 우리 개인이.




사실 현대 사회, 정치기 이룩한 아름다운 성과물이 제 역할을 해야만 하며, 정책적인 접근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개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건 적어도 내가 인식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문제를 방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정치, 사회 역시 참여라는 연료로 돌아간다. 때문에 어떤 길을 택해도 우리는 빨간약을 먹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게 고통스러울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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