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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May 16. 2017

슬픔에 관한 소고

거리에서, 너와 나의 거리

BGM <부치지 않은 편지 — 김광석> (링크)


2009년


함께했던 거리에서 바라본다.
음악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쳐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거리에서, 너와 나의 거리는 멀어졌으니깐.


하얀 거리를 보고 싶었다.
아스팔트, 보도블록. 지겨워서.
자주 걷던 거리,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이나 부린
그 거리 이젠, 뛰어다녀도 좋을 것 같은데,
거리에서, 너와 나의 거리는 멀어졌으니깐.


걸어가면서. 친구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면서.
그러면서 지나가는 이 거리는.

그냥 — 혹시나 본다면 그냥 이 사람 아직도
라면서 웃으며 넘겨주길 바라.

거리에서, 너와 나의 거리는 멀어졌으니깐.


(이글루스 원본)



2010년


 아무래도 항상 나는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그 어떤 곳도 나와 전혀 맞지 않다고도 생각한 적이 있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모든 곳에서, 가끔은 정말로 푸른 하늘이 싫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다니던 적도 있었다. 항상 거리에서 서면, 나 혼자 방황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어쩌면 애정결핍이었을지도 모른다. 발걸음이 빠른 어머님을 따라 걸을 때, 4살 차이 형님을 따라 걸을 때 더 빨리 걷기 위해 보폭을 늘렸던 때를 기억한다. 다만, 힘들었을 뿐이다. 적응하기가. 

 사실 중학교 때는 왕따 비슷한 상태에 놓였었다. 그래도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었다. 아니 사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살았었다. 대신 강하던 자존심이 그 순간에 많이 꺾였던 것 같다. 중학교 때 성적은 고만고만했던 까닭도 있었겠지. 나는 - 천재가 아니라 생각은 했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나는 둔재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와 집 사이의 거리에는 만화책 대여점이 있었고 또 학원 역시 같은 노상에 있었다. 웃기는 거리였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가 아니라 나에게. 어쨌든 아무런 목적이 없이 걷다가 아무런 생각 없이 대여점에서 시답잖은 책 몇 권 빌려서 그날 다 읽고 반납하고는 했다. 그것이 내 유일한 - 즐거움이었을까. 남들은 스타크래프트, 리니지에 빠질 때 사실 나는 그런 것은 잘 하지 않았다. 왜냐? 다른 이유보다는 내가 그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었고 실제로 그러니깐. 잘 못하니깐. 그래 - 그때부터 시작이었을까. 남들보다 잘할 수 없다면 포기해 버리기 시작했었다.


 2008년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에겐 친한 대학 친구가 있다. 그의 집은 가난한 편이다. 그렇다고 그는 딱히 그 사실을 좋아하진 않아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는 않았다. (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너무나 모른다.) 그는 항상 자신이 집이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남들 부럽지 않을 정도로는 돈을 쓰고 다녔다.(물론 그것이 풍족하게 쓴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지지리도 돈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벌어서. 


그런 친구가 몇 있었다. 내 주위엔. 그는 그래서 사회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할지언정 사회를 증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그와 내가 가까워진 언젠가, 그의 집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는 오히려 내가 사회에 대해 불만이 커져만 갔다. 그렇게 대학교 신입생 시절부터 우리는 같이 다녔고 같이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앞장서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앞에서 걸었고 나는 항상 곁에 있었다.


 그런 그의 곁엔 친구가 많았고 나도 그렇게 아무도 없던 나의 대학생활의 범주에 다른 사람들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를 위주로 모인 사람이고 우리의 성향은 다들 고만고만했다. 불만은 가득 차 있었지만 딱히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끔 - 나를 제외하고 집안이 어쨌든 잘 살지 못하는 친구들은 금전적으로 위기가 몇 번 오기도 했었다.(라고 또 판단한다. 생각보다 가깝지 않아서인가, 그 정도 문제는 잘 털어놓지 않는 편이지)


 술자리에서, 우리가 다니는 대학의 다른 학생들을 이야기했다. 집에 재산이 없고 빚만 있는 처지를 이해 못한다거나 전세라는 것에 대하여라던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그랬다. 그렇게 거창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이야기해도 결국 이렇게 미시적인 영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보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학점과 등록금 그리고 취직에 지나지 않았으니깐. 상아탑의 환상은 신입생, 아니 단 한 학기만을 학교에 머물러도 깨지는 것이었다. 수능을 돌파해도 세상은 우리에게 언제나 경쟁만을 강요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항상 가진 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학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지에 같은 답을 적어나가면서도 언제나 반발하고 있었다.


 앞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당장에 분노하는 것은 학교 행사에 나오지 않는 선배 후배 동기의 이야기였다. 연애 이야기였고 다음 학기 등록금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친구는 작은 단위의 학생회에 나가게 되었고 우리는 그를 도왔다. 처음엔, 거의 동문회 수준의 아무것도 아닌 조직이었다. 학기가 시작할 때 한번 모이고 중간중간에 시험을 친다거나 MT를 간다거나 하면서 하는 실무적인 일을 도맡아 했다. 아무도 그 일을 하기 싫어하는 상황이 싫었다. 


 그리고 다음 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동안 만난 사람을 통해, 단과대 단위의 학생회를 맡게 되었다. 우리 중 몇몇은 군대를 가고 돈을 벌기 위해 밖으로 나가고 그리고 남은 몇몇은 그를 도왔다. 시작은 그렇게 1달이 지나갔을 때였다. 딱히 특정 대통령 때문이라거나 어떤 법안 때문은 아니었다. 대규모 학교 행사 추진에 있어서 불거진 문제에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일이라 생각하고 매달렸다.


 그리고 2008년 5월 6월이 되면서 우리는 정말 '어쩌다 보니' 거리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그전에도 선배들을 따라 몇 번을 갔다고 하는 거리였지만 나에게 그곳은 생전 처음 보는 하나의 전쟁터였다. 물론 내가 군 생활하면서도 시위 현장의 폭력 행위를 많이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때도 내가 있던 곳은 비교적 평화롭고 조용한 곳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 뿌려지는 각종 단체들의 이념이나 이상들 혹은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나에겐 폭력과 다름없었다. 


 그때부터 - 각종 매체들이 앞다투어 보도하던 실상을 보기 위해 스스로 거리에 몇 번 나섰다. 그 없이 홀로 몇 번을 나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예정되로 나는 입대를 하게 되었다. 그의 임기가 2008년 한 해 동안이었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그 역시 내가 군 생활하는 동안 광화문이나 청계광장에 몇 번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나뉜 거리의 반대편에서 다시 붕 떠있었다. 어디가 옳고 그르다는 것은 잘 몰랐다. 진압복을 입고 방패를 서고 있는 내 모습은 싫었지만 그렇다고 시위하는 사람들 사이의 나도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젠 그 친구도 없고 다른 친구들도 없어서 더욱더 그랬다. 


 나는 무채색이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빨갱이라고 욕을 먹었을지언정 차라리 그에 대한 반발심이라도 내 심장에 시동을 걸었지만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점화되지 않는 엔진에다 연료마저 떨어지고 있었다. 풋사랑을 엄청난 자신의 실수로 날려버리고, 그와 함께 걷던 길도 중간에 나와 버리고 다시 나온 거리에선 - 사랑도 이상도 없었고 그저 나는 내가 걷던 길의 반대편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부대에서는 그랬다. 나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우리 또래의 나이에겐 먼저 학교는 어디인지 묻게 된다. 우리 부대에서 일반적인 기준에서 나 이상의 학벌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학교에 있을 때는 항상 내가 가장 못났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는 가끔 마치 내가 이미 성공한 인생을 사는 듯한 말을 듣게 되었다. 사실 그의 친구 그룹 중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면서 듣는 소리도 비슷했고 실제로 - 아무리 불경기라지만 우리 학교에서 취직을 잘 못했다는 사람의 말은 듣기 어려웠다. 그의 집을 처음으로 갔을 때처럼, 다시 또 나는 다른 세상에서 충격을 받고 있었다. 


 나에겐 아무렇지 않던 일들이 이들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지만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서울권의 대학생이라는 지위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메워주는 보증수표였다. 사람들은 나에게 대학의 이름을 걸고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집안에서도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집보다는 밖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리 느끼질 못했는데, 부대에 와서는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몇 번을 다시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교육대학에 다니는 친구는 줄어든 교사 자리에 위기를 느끼고 거리를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은 - 그의 친구 그룹마저도 쉬는 시간에 담배와 함께 어떻게 앞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주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명문대라고 치켜세워봤자 나 역시도 이곳에서 하는 걱정인 그리 대국적이지 못했다. 그저 다음 훈련은 어떻게 해야 하나 혹은 오늘은 추운데 방범 나가기 싫다, 오늘 메뉴는 맛없는데 따위의 매우 일차원적인 고민에 지나지 않았다. 점차적으로 붕 떠있던 나 자신이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가라앉고는 있었다. 하지만,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있어도 아직까지 남은 스프링 같은 반발심은 잠재의식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사실, 군대라는 조직에서 가지는 특수성은 분명히 사회의 기준으로 불합리함을 조직원에게 선사한다. 그리고 그 불합리함과 거리에서 느껴지는 무거움은 아직도 고개를 들고 살기 힘들게 한다. 가끔 외박이나 휴가를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치열하거나 거창하지 않아도 그 나름의 인생에서 거리에서 들리는 외침 소리가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말을 안 해도 자기 만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니깐. 




2015년 


5월과 광주를 연결하면, 경기도 광주는 대체적으로 제외되는 편이다. 사람들은 강렬한 것을 더 잘 기억한다. 더 큰 것, 더 빠른 것, 더 기쁜 것 혹은 아주 슬픈 것. 그래서 5월, 광주에 대한 생각을 ‘슬픔’이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해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그 시절의 나에게 광주는 명확하지 않았다. 사실, 근현대사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아니, 내 배움의 영역, 그러니까 수능 과목 외의 것에는 굉장히 어두웠다.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은 미군 탱크로 인한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전반적인 풍자, 조롱조의 기류가 흘렀고, 공군의 FX사업이나, 탄핵소추, 행정수도 이전 등으로 관심은 옮겨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역사의 슬픔에 대한 가장 큰 부분은 민족주의적 감성으로 뒤덮여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배움은, 임진왜란에 대한 배움은 혹은 그 시대를 살아오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그 무렵에도 있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은, 수능을 준비하는 나에게는 또 다른 단원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근현대사’ 과목을 선택하지 않은 나에게는 머나먼 이야기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공부를 했던 그 시절에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없었다.


대학교에 와서, 인터넷을 하며 배운 것들도 단편적이었다. 전두환 나쁜 사람, 박정희 나쁜 사람 정도. 혹은, 깊게 파고들었으나 감정적인 이해를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 감정이 조금 더딘 편이기도 하거니와, 대학 신입생 시절은 타지 생활에 초기의 우울증, 향수병 증상에 시달렸으며 세상은 어차피 잘 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통속적인 표현이 잘 들어맞는 시기였다.


또, 나는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기에 그런 문제에서 많이 회피했다. 나 위주로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시절엔 고민거리가 너무 많았다. 늦게 찾아온 첫사랑이나 첫 연애.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서울 생활. 없는 돈, 낯선 천장. 군 입대 문제. 때문에 나의 주된 관심사는 내 주변의 일들에 대한 내 상식 기준의 적용이었다. 그리고, 그게 되지 않을 때는 행동하지 않는 불만을 가지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리고 시작은, 필연적이었다. 처음은 학생사회였다. 학내 토론 동아리에서의 작은 만남들, 이해할 수 없이 완고한 보수적인 사유에 대한 반발. 그리고 총여학생회 해체와 유사한 내용의 ‘총학생회’의 등장은, 스스로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게 하였다.


내 불만은 커지고 커져, 현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자랐다. 때문에 2007년 대선 후에도 난 계속해서 정부에 불만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나의 친한 친구는 단과대 학생회장이 되었다. 당시의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편한 군대를 가기 위해 노력하다 실패하고, 집 근처에서, 나름 편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의경을 지원하여,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첫 연애도 실패하였고, 할 것도 의욕도 없는 나에게 단과대 학생회장이 된 친구는 장소를 마련해주었다. 학생회실은 내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대한 내용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짧지만 농활도 다녀왔다. 첫 연애가 CC였고, 소심한 성격 탓,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먼저 입대한 탓에 갈 곳이 학생회 밖엔 없었고,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들이 많은 부분이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강화시키는 것들이었다.


우리에겐  87년 6월 항쟁을 기록하고, 계승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때문에, 기념하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해야 했고, 거기서 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등 돌렸던 슬픔들에 대해서 마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까지도 굉장히 ‘이성적인’ 범주의 마주침이었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렇게 행동한 것이 옳았다는 세계관의 확장을 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먼저 광우병 관련 촛불 시위가 있었다. 응집된 시민 사회가 있었고, 흩어지게 하려는 공권력이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왜냐면 그 거리는 꽤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떤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무서운 내게, 박종철 열사가 당한 고문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 것인가. 거슬러 독립운동가들은? 나는 주먹으로 한 대 세게 맞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털어놓을 것 같았다.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사상적인 세뇌? 글쎄 그것 만으로 생존본능을 이겨낼 수 있을까? 물론 민족주의적 감성과 결합한 사회주의 사상은 매력적이지만, 굉장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내게, 나 스스로의 행복 이상으 무언가가 있을지, 감히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학교 축제에서의 문제가 불거졌다. 단순히 이야기하면 학교 축제 중 한 행사의 참가비가 오른 것이다. 만약, 위의 사건들이 없었다면 굉장히 편하게 물가가 올랐나? 더 많은 연예인이 오는가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시점의 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우리 축제를 위해 티켓을 사야 하는가? 학생회비도 이미 냈는데? 예산 이상의 행사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가 학생사회에 이리도 깊게 파고들어도 되는가? 상업 행사가 아니라면 적어도 예결산 내역은 공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치적인 생각이란, 본인에게 밀접한 사안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에게는 이 시점이 중요했다. 때문에 긴 회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고 여전히 부끄럽고, 혹은 자랑스럽게 생각되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준비되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앞서 언급한 앞서 나간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입대를 한다. 대한민국의 특수한 병역 의무 체계인 의무경찰순경으로 입대를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는, 무서웠던 거리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사실은, 지방의 의경이 되면 시위의 주무대인 서울에 설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광우병, 촛불의 시기를 지내고 나서면서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건, 꽤나 현실이 되었다. 그 횟수는 과거에 비해서는 꽤나 적었지만 우리 부대는 서울로 그 목적지로 잡기도 했다.


그리고 나뉜 거리의 반대편에, 난 다시 서게 되었다.

그다지 우수한 병력은 아니었기에 많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대학생이 행진할 때, 바라보며 떠올린 단편적인 생각이나, 소주병이 어디선가 던져지고 있을 때,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고립될 뻔했던 어떤 순간, 남일당(용산 참사)에 계시던 분들과의 작은 몸싸움(물론 당시에는 격렬한 전투, 같았다)


학생회를 하던 나는 그 집단(의경) 안에서 나를 보호해야 했고, 가능한 모든 행적에 대해서 숨겼고,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드러내지 않은 채로 숙성되기 시작했다. 그건 슬픔이었다. 건방지게 들릴 순 있겠지만, 나는 나뉜 거리의 두 편에 모두 서 보았으니까. 시기와,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나는 분명히 서로 다른 두 편에서 서서, 거리를 달리고, 걷고, 앉고, 울었다.


나뉜 거리가 슬펐다. 여전히 그렇다는 게 슬펐고, 그 시점부터 부채의식은 자라났다. 고작 이 정도로 나는 슬픈데, 저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슬펐을까. 여전히 본능에 꽤나 충실한 삶을 살면서도, 이맘때가 되면 다시 슬퍼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5월과 광주라는 단어가 만나면, 나는 슬프다. 이젠, 다른 사람이 무어라 말하는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대응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그리 슬펐다고 나는 생각한다. 때문에, 엥똘레랑스에 엥똘레랑스로 대응하거나 똘레랑스로 대응하거나 하는 질문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내겐, 이 내 슬픔이 너무나 아프고, 소중하다.


이해나 공감을 바라지는 않는다,라고 쓰다 아니다 라는 마음에 문장을 고쳤다. 나는 ‘공감’을 바란다. 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겪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아플 수 있다는 것은 그 당사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슬플 것이다.


팩트, 진실에 대해서 사람들이 ‘감정적인’ 접근으로 ‘받아’ 달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정말 수억, 수조 분의 일의 확률이라 생각하지만 내 생각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5월, 광주, 1980년의 그 일들이… 남긴 것은 슬픔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 넋을 위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현 대통령이 보다 진정성을 가지고 광주로 내려갔으면 하는 바람이, 수년 전부터 있었다. 아니, 그게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와 입장은 다르다고 하여도 적어도,


슬픔만은, 나 조차도 느낄 수 있는 것은
‘실재’한다는 것만은 받아들여주었으면 한다.




사족. 쓸데없이 긴 글보다는…
6월 항쟁이 주되지만 최규석 화백의 100도씨 링크

1차 작성: 2009년 02월 02일

2차 작성: 2010년 01월 20일

3차 작성: 2015년 05월 16일

편집 및 퇴고: 2017년 0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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