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 사주, 신점과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관심을 안갖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도 몇 번의 경험은 있었다. 고등학생 때 수능을 치르고 친구들과 재미로 압구정의 한 사주 카페를 간 적이 있다. ‘ㄱ’이 들어가는 대학에 갈 것이고 40대에 정치인이 된다고 하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ㄱ’이 들어가는 대학에 갔다가 자퇴 후 재수를 했으니 그 분 말씀이 어느정도 맞긴 했다. 그 뒤로 대학생 때 친했던 누나와 대학로에서 타로를 봤던거 같다. 그때 들었던 말씀은 ‘너무 모두에게 잘해주지 마요’. 그 후에는 가장 오래된 중학교 친구 주영이와 한남동을 거닐다 갑자기 사주를 봤던 기억이 있다. 즉흥적으로 들어간거라 궁금한 점들이 없기도 하고 질문을 하기가 왠지 조심스럽기도 해서 질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더니 내 이미지와 부합하는 정도로 가볍게 말씀해주셨던 것 같다. 서른 후반이 되어 하고 있던 모든 일을 멈추고 하루하루를 운동, 독서, 글쓰기 그리고 가끔의 술 한잔으로 채우고 나니 몸과 마음이 더욱 편안해졌다. 여전히 타로, 사주를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전 친한 동생이 운영하는 도자기 공방의 첫 정규 수업을 듣고 함께 점심을 먹다가 문득 ‘타로 같은거 볼래?’라는 말이 툭 나와버렸다. 이틀 전쯤 유튜브에서 지드래곤이 타로를 보는 영상을 봐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나도 모르는새 이미 질문은 던져졌다. 동생은 타로보다는 사주를 보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우선 커피를 마시러 이동했다. 마침 동생의 공방과 카페 근처에 신점, 사주를 보는 점집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평소에는 크게 인식하지 못했는데 사주를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니 꽤 많은 점집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우연히도 카페 바로 옆 점집이 4년 전 동생이 공방을 시작할때 같은 건물 지하에 있던 곳이었다. 그 곳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동생이 신기했다. 이사할때 얼굴을 몇 번 봤다는데 무당 분이 동생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궁금해졌다. 둘 다 점집은 처음이라 우선 전화로 지금 가도 되는지, 실례지만 비용은 어떻게 되는지를 여쭤보았다. 생각보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친절하셔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카페를 나와 바로 옆 점집의 작고 빨간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는데 초인종을 여러 번 눌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괜스레 지나가는 행인들과 어색한 눈빛을 주고 받다가 드디어 문이 열렸고 인상 좋으신 아주머니가 ‘들어와요’하며 반겨주셨다. 작은 방에서 조그만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무당 아주머니와 마주 앉았다. 생각보다 긴장되거나 신비로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상냥하신 친구 어머니를 처음 만나뵈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신점과 사주가 적절히 섞인 점이었고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말만 해주신 덕에 기분 좋게 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 여전히 점을 보는 것에 관심은 없지만 앞으로 좋은 일들이 생길거라는 말은 삶을 살아가는데 나를 무조건적으로 응원해주는 작은 서포터즈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인생 전체를 너무 낙관적으로 받아들여 현실 감각이 더욱 낮아질 것만 같은 작은 우려도 들었다. 그 후로 길거리에 사주, 타로가 쓰여있는 간판들이 눈이 잘 띄기 시작했다. 나는 무교이고 점을 보는 것에 대해 종교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거나 좋고 나쁨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주는 상황을 만들고 나니 평소에 실천하던 ‘관심끄기’의 노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어제 엄마와 점심을 먹으며 슬쩍 점을 본 얘기를 꺼냈다. 교회를 다니시는 엄마는 그런거 보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궁금해 하시는 눈치셨다. 누군가의 조언이든, SNS 숏폼의 마음이 동하는 명언이든, 무당 아주머니의 신신당부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성이 있다면 그 어떤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길을 나아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언젠가 누가 재미로 보자고 하면 또 볼 수도 있겠지만 그때까지 관심을 잘 끄고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