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각자 다른 순간을 추억한다.

그녀와 그의 입장차이

by 슈브

스무살 혜진이와 스물여섯 살 지철이는 3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이별한지 벌써 2년하고도 반년이 더 지났다.



그, 행복했던 추억.


내 이름은 김지철 나이는 어느새 삼십 그리고 하나 더.

그녀를 처음 만난 건 5년 전 건대의 어느 술집, 내가 스물여섯 살 때였다.

처음에 든 생각은 '와, 진짜 예쁘다.'

친한 동생 주영이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지만 이미 그 녀석과의 대화는 관심 밖이었다.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며 맥주를 홀짝이는데 그녀가 친구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어떡하지.. 말 걸어볼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녀는 계산을 마치고 술집을 나가버렸다.

10초 정도 고민한 끝에 당시 내 좌우명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후회하지 말자'


황급히 술집 문을 열고 좌우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멀리 가지 않은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음 날부터 세 번의 데이트를 하고 그녀는 나만의 혜진이가 되었다.

우린 가끔 다투기도 했지만 서로를 정말 사랑했다.

혜진이가 나를 올려다 보며 웃는 모습도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거 다하는 애교도

내가 친구들이랑 놀고 있으면 자기랑 놀아달라고 징징대는 수화기 넘어의 목소리도

모든 게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이별은 순식간에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이별을 앞당겼다.

가끔은 혜진이와의 시간보다 친구들과의 시간을 더 우선시했다.

친구들과 술 한 잔이라도 하게 되면 혜진이와의 연락도 소홀히 생각했다.

'혜진이는 언제나 날 바라봐주고 내 옆에 있어 주는 존재니까'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이런 상황이 몇 번 이어지면서 우리는 짧은 이별과 만남을 반복했다.

그렇게 세 번째 이별이 다가왔다. 마음은 아프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우린 다시 만날거니까'


그러나 그 세 번째 이별은 2년 반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마 세 번째 이별이 혜진이와 나의 마지막 이별이 될 것이다.

혜진이와 헤어지고 다른 몇 명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러면서도 친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항상 혜진이 이야기를 했다.

사랑 노래, 이별 노래를 들으면 언제나 혜진이가 생각났다.

혜진이와 함께 했던 시간은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안되는 줄 알면서도 술 한 잔하거나 문득 보고 싶을 때 가끔 연락을 했다.

혜진이는 연락을 받아 줄 때도 받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난 혜진이와의 행복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현재 그녀의 모습이 궁금했다.

단지 반갑게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잘 지내고 있는지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약속을 잡았지만 혜진이는 매번 당일 날 만남을 취소했다.

'지금 남자친구한테 미안해서 안되겠다.'는 같은 이유로 항상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야속하긴 했지만 혜진이가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 놈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녀, 너무 아팠던 기억.


내 이름은 이혜진 나이는 어느새 스물다섯.

그를 처음 만난 건 건대의 어느 길거리.

"안녕하세요,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연락처 물어봐도 될까요?"

질문도 뻔하고 별로 관심도 안갔지만 거절하기도 피곤해서 그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줬다.

그 날 밤, 조심히 들어가라는 문자로 시작된 연락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돌아오는 금요일 밤, 그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

카톡으로 말도 착하게 하고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아서 저녁이나 한 번 먹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강남역의 한 이자카야에서 간단히 한 잔하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했다.

별 기대없이 만나서 그런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함께 하는 시간도 즐거웠다.

그 날부터 24시간 연락을 주고 받고 두 번의 데이트를 더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좋아하던 돈부리를 먹으며 내가 먼저 말했다.


"오빠, 우리 안 사겨?"


그렇게 그는 나만의 지철이가 되었다.

우린 가끔 다투기도 했지만 서로를 정말 사랑했다.

지철이가 나를 내려다 보며 미소 짓는 모습도

택시든 음식점이든 어디서든지 예의 바른 태도도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늘 명확히 갖고 있는 확신도

모든 게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이별은 순식간에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이별을 앞당겼다.

지철이는 친구들과의 술 약속이 있는 날은 연락이 잘 안됐다.

그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불 꺼진 방 안에서 혼자 화내고 울면서 점점 지쳐갔다.

늦은 시간에 술 마시면서 연락이 안되는 애인을 기다리는 그 암울하고 힘든 감정을 나만 느끼는 게 억울했다.

그래서 일부러 연락을 안 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있으면서 집이라고 거짓말도 해봤다.

그렇지만 지철이의 그런 행동은 반복됐고 그때마다 우리는 짧게 이별하고 또 짧게 다시 만났다.

지철이와 만나면서 울고 붙잡고 아파하면서 나는 너무나 지쳐버렸다.

그렇게 세 번째 이별이 찾아오고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이렇게 힘들고 싶지 않아'


세 번째 이별은 지철이와 나의 마지막 이별이다.

지철이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친구를 만났다.

친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친구들은 지철이를 만날 때 힘들어 하던 나와 지금의 행복해 하는 나를 비교해서 말해줬다.

나는 지금 나름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런 나에게 지철이는 가끔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 연락은 드문드문 2년이 넘도록 반복됐다.

지철이한테 연락이 올 때마다 이별하던 순간의 아팠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아파하고 울면서 지철이를 만났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오랜만에 얼굴보고 밥이나 먹자는 지철이를 보며 '내가 만만한건가.. 참 쉽네..'라고 생각했다.

물론 만나면 반가울 것 같아서 몇 번 약속을 잡긴 했지만 만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 매번 만남을 취소했다.

'지금 남자친구한테 미안해서 안되겠다.'는 이유를 둘러대며 얼굴을 보지 않았다.

스무살 초반부터 삼 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준 그에게 감사한 마음도 있다.

어쩌면 조금은 그 덕에 별 탈 없이 이십대 중반의 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 내가 아파하고 힘들었던 때를 떠올리면 아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렇게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과 다시 만난다거나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낼 수는 없다.

그래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앞으로 더 좋은 더 예쁜 일만 있으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빈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 다른 순간을 추억한다.


남자는 그녀와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여자는 그와의 힘들었던 순간을


그래서 남자는 가끔 그녀가 보고 싶다.

이별 노래나 멜로 영화를 볼 때 나를 행복하게 하던 그녀가 생각난다.

친구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서로 사랑했는데 남은 평생을 굳이 남으로 지내야 되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그녀가 지금 행복하다면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여자는 가끔 그가 떠오른다.

지금 옆에 있는 남자친구가 잘해줄 때 나를 아프게 했던 그놈 얼굴이 생각난다.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아파했는데 굳이 남은 평생에서는 알고 지내고 싶지 않다.

그래도 그 놈이 좋은 여자 만나 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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