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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섭 Jan 07. 2022

퇴사 후 1만시간을 쉬었다.

퇴사라는 광야 학교를 지나는 법_탈직장인

무엇이든 전문가로 만들어준다는 그 시간의 법칙. 퇴사 후 1만 시간을 쉰 나에게는 어떻게 작용될까(하루 9시간x365일x3년, 올해 3월말 기준). 처음 회사를 나와 스스로 다짐했다. "3년 안에 연봉 1억 값을 하는 1인 기업으로 거듭나겠다." 이 말은 벌써 공수표가 됐다. 눈 녹듯 사라진 찐 숙성의 시간 3년. 코로나 악몽에서 깨어 정신을 차려보니 이 지경이다.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다. 꿈꿨던 1인 기업에 한참 못 미쳤다. 그저 놀다시피 3년을 보냈지만 뭔가 건진 것도 있지 않을까. 굳이 찾자면 탈직장인으로 3년을 버텼다는 것. 20년간 길들여졌던 직장인의 습성을 하나씩 벗었다. 첫 직장 나와 1년을 못 버티고 재취업한 걸 생각하면 변화는 변화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모아논 돈이 많아 먹고살 만 한가. 일머리가 커서 똥배짱인가.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홀로서 있어도 견딜만한가. 다 다. 확실히 간이 좀 부었다. 놀고먹는데 뻔뻔해졌다. 늦게 일어나도, 때론 온종일 아무 일 없이 놀아도, 하루 3-4시간은커녕 1시간 채 일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없어졌다! 퇴보인지 진보인지, 무뎌진 건지 자유로워진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은퇴자가 일이 없으면 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올해 40대 후반에 접어든 자칭 반퇴자다.


사회 초년생 시절, 바쁘지 않으면 죽는 줄 알았다. 성실함의 아이콘으로 불리길 바랬다. 고3 때 산학협력으로 일찍 취업 실습을 나갔다. 정직원이 된 기쁨이 채 사라지기도 전, 첫 직장인 1년 차 끝에 인근 야간 대학에 진학했다. 직장은 구미, 학교는 대구 옆 경산에 있었다. 거의 매일 이 거리를 4시간씩 왕복했다. 장거리 연애도 아니고 장거리 통학은 미치지 않고서는 못 할 일이었다. 학교 마치고 회사 기숙사에 오면 밤 12시가 넘기 일쑤였다. 잠자리에 들기 무섭게 또 일어나 눈 비비며 출근했다. 당시 출근은 7시, 퇴근은 4시였다. 길에 돈을 뿌리고 다닌다는 우스개 소리도 들었다. 이렇게 4년을 버텼고 졸업장을 받았다. 당시 꽤 엄격한 조직 분위기와 바쁜 업무, 심지어 IMF 혼란기도 이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이 시기 '세상에서 제일 독한 놈'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것도 내가 가장 독하다고 치를 떨었던 직상 상사에게서다. 졸업하자마자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 길에 올랐다. 대학에서 피땀 흘려 얻은 새 전공을 썩혀두기 싫었다(전자에서 외국어로 대학때 전공을 변경했다). 유학 가서도 밤 12전에 마음 편하게 못 잤다. 어설픈 야간대 졸업생을 압도하는 숙제량 때문이었다. 이후 재취업한 직장에서는 초창기 설립 멤버로 청춘을 바쳤다. 초기에는 1개 센터를 홀로 맡아 운영하느라, 관리자가 되어서는 공공기관 통폐합 위기 속에서 조직을 살리느라 정신없었다. 퇴사 직전에는 이부서 저부서, 이사람 저사람 눈치 보고 새 업무 적응하는 게 일이었다.


나름 치열했던 시간, 년수로 치니 꼬박 20년이 됐다. 대기업 회사원으로, 유학생으로, 공공기관 직원으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아등바등 숨 막히게 살았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이켜 보니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20년을 일해도 여전히 내 집 한 채 없었다. 노부모님은 70세를 바라보는 연세에도 쉬지 못했다. 간병사로 병원에서 몇 달씩 나오지 못하고 일하셨다. 밤낮으로 남의 몸 돌본다고 쪽잠을 잤다. 자신의 몸 축나고 병드는 건 신경 쓸 처지가 못됐다. 원체 가난했던 형편에 평범한 직장생활은 뾰족한 답을 주지 못했다. "이대로 얼마나 더 살아야 될까. 진짜 원하는 것도 그렇지만, 최소한의 필요한 것 걱정은 없이 살아야지." 이후 달라지기로 했다. 직장에 목매달고 답을 바라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없었다. 개인의 답은 개인이, 회사의 답은 회사가 찾아야 한다. 회사가 개인의 답까지 찾아줄 만큼 친절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회사는 개인의 힘을 긁어모아 자신의 목적 이루기도 바빴다. 그러자 회사 밖으로 눈 돌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주말에는 살 집을 찾고, 심지어 월차 휴가를 내고 경매 현장까지 쫓아갔다. 모아둔 돈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가족의 부족한 수입을 메꾸기 위해 부업으로 할만한 사업도 알아봤다. 서랍에 묵혀뒀던 비전 노트도 다시 꺼냈다. 거기서 "글로벌 CEO, 45세까지 기업가로 사업 정착"이란 말이 눈에 뗬다. 20대부터 품은 꿈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 했다.


"이제 회사는 돈 받는 만큼만 일해야지."  그러자 자연스럽게 회사 일, 사람들과의 거리가 한 발씩 멀어져 갔다. 회사 사람들은 귀신 같이 알아챈다. "이 사람 마음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은 설령 마음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은 마음을 다해 자신을 대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큼 일 해주길 원한다. 이전 상사들은 적당히 부하 직원한테 맡겨놓고 당당히 자신의 일을 봤다. 직원들도 적당히 일하고 숨어서 딴짓 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내가 상사가 되자 이제 이런 일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부하 직원한테 일 맡기는 것도, 숨어서 딴짓하는 것도 적당히 할 수 없었다. '돈만큼' 일하는 척을 제대로 못 했다. 회사는 한 인생에 온전한 답을 주지 못해도, 여전히 그 인생의 영혼을 송두리째 원한다. 영혼을 숨길 수 없었던 나의 갈등은 커져갔다. 회사 일이냐, 자신의 일이냐 사이에서 외줄을 탔다. 의외로 선택의 순간은 빨리 찾아왔다. 직장 상사와 업무 추진방향을 두고 이견이 커졌고, 가치관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꾹꾹 참고 넘어갔을 일도 마음이 떠나자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인간관계, 추구하는 가치, 적은 월급까지, 작은 일에도 흔들렸고, 그토록 두렵던 퇴사가 편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20년간 재온 '새 일'에 대한 진심이 임계치를 넘었다. 이것이 준비와 실행을 거듭하며 폭발하는 순간, 나는 퇴사자가 되었다.


영혼의 퇴사자, 탈직장인에게도 고민은 있다. 직장 밖의 시간은 참으로 낯설기 때문이다. 평생 직장인이었던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우선 퇴사자는 출근할 곳이 없다.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더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생각보다 9시 출근, 6시 퇴근이 주는 안정감은 크다. 회사 가면 놀더라도 최소한의 일은 한다. 주변의 눈치상 아무리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놀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동료들과 밥 먹고 수다 떨던 당연한 시간도 퇴사자는 힘써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적든 많든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은 어떤까. 직장인이 절대 끊을 수 없는 천상의 영약이자 마약 같은 존재다. 누구든 이것 때문에 감히 직장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되는대로 무한정 놀며, 혼자 벙어리처럼, 3년을 월급 한 푼 없이 쉬어 보니 알겠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은퇴하신 노부모님과 늦은 아침을 먹으며 때론 유일한 벗처럼, 사업 파트너 같이 느긋이 대화를 나눈다. 마음껏 글을 쓰고, 원하면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책도 볼 수도 있다. 오후에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강변 수풀들의 노래를 들으며 걷는다. 이렇게 서너 시간 마냥 걷는 행복감을 직장인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가게도 일하고 싶을 때, 손님 있을 때 잠깐 선택해 다녀올 수 있다. 또 어느 날 열정이 솟으면 새로운 투자 거리를 찾아 이도시 저도시 헤매며 여행한다. 퇴사자는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어떤 것도 사실 마음처럼 쉽지 않다. 이 망망대해와 같은 현실은 좋게 말하면 무한한 가능성이다. 하지만 문득 눈을 떠보면 바다 한 복판에 홀로 내쳐진 것 같이 두렵고 외로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3년을 버티고 이 여정을 계속하는 이유는 있다.


회사 밖에서는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맘껏 추구할 자유가 있다. 스스로 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자기만의 시간 안배가 가능하다. 하고 싶은 만큼 일하고, 책임도 열매도 모두 자기 몫이다. 무엇보다 영혼의 소리에 응답하고, 자신의 일과 삶의 답을 오롯이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회사나 누구도 줄 수 없는 답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목 빼고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부족하고, 불안하더라도 탈직장인의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온전히 웃을 그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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