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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섭 Nov 19. 2019

통역사의 수명은 언제까지일까?

외국어 전공자에게 통역은 숙명 같은 것이다. 유학 때, 개인 사업가나 기업 행사, 개별 여행자그룹 등에서 간간이 들어온 통역 아르바이트는 마치 앞으로 가야 할 길, 미래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이제 진짜 프로가 되는구나"라는 자부심과 함께 외국어 공부에 흠뻑 빠지게 하는 따끔한 자극이 되기도 했다. 군대에서 매일같이 뉴스 방송을 통역하며 한 단어라도 놓칠까 봐 늘 긴장 속에서 지켜봤던 모니터처럼 통역 일도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직장에서는 현장 통역부터, 국제회의, 무대행사, VIP의전까지 그 횟수가 점차 늘어 100회를 훌쩍 넘겼다. 통역 대상도 학생부터 시민, 예술가, 공무원, 기업인, 시장 등 분야와 계층을 가리지 않았다. 열정이 넘쳤고, 치 이 일을 위해 태어난 것도 같았다.


직업 통역자로 일한 지 5년이 넘어 10년이 다 되어가자 조금씩 이상 조짐(?)이 보였다. 함께 일하던 주위 동료 통역자들이 하나둘씩 통역 현장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장 통역자에서 부서 과장, 부국장, 지사장이 되었고, 그 자리는 더 젊은 통역자들이 채웠다. 현장에서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통역한다는 것 자체도 여간 체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든 생각이 "내가 언제까지 이런 통역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있을까"였다. 물론 통역 일이 젊은 사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여러 행사나 회의에서 보면 종종 나이 든 원숙한 통역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대학 교수나 강사, 심지어 은퇴자도 있다. 은퇴자의 경우 보통 현장 통역보다 시간을 가지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번역 쪽이 더 어울리긴 하지만, 지인 관련 일 등에 간혹 보인다.

출처: blog.naver.com/sunnyclub1


일선에서 물러나도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이전 전문성을 살려 후진을 양성하거나 그 분야 관련 사업을 하는 것이다. 한창 이름을 날리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은퇴해 기획사를 세우거나 감독 등으로 일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한때 통역사들의 현장 경험이나 스킬 향상을 위한 세미나, 미래 통번역사 양성 워크숍 등을 연 적이 있다. 현장에서 당황하지 않고 통역하는 요령이라든지, 통역사가 주체가 되어 해외 프로젝트를 발굴하는 방법 등을 전수한 것이다.


통역사의 수명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 뛰어난 순발력을 발휘해 현장 통역을 하든, 원숙한 경험을 살려 성공적인 분위기를 이끌든, 후진을 양성하든, 노후 시간을 활용해 봉사하든, 자신의 시기에 맞는 다양한 역할이 가능하다. 단지 통역사의 정신만 잊지 않으면 된다. 진정한 통역사의 능력은 단순히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 말로 바꾸는 데 있지 않다. 사람과 사람 마음의 간극을 메우고, 다양한 문화와 세계의 일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 참여자 모두가 흔쾌히 동의하는 작 변화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장수하는 통역자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정신을 가지고 현장을 지키는 것이다. 평생현역의 마음가짐이다.


나는 오늘도 통역자의 포트폴리오를 뒤적여본다. 마치 오래 사용하지 않아 시동 꺼진 자동차가 배터리를 갈고 다시 거리를 쌩쌩 달릴 꿈을 꾸듯이, 젊은 통역사들과 함께 다시 현장을 누비는 그날을 즐거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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