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어난 작은 작가적 체험을 나누고자 한다. 몰입해 글 쓰는 유익함이다. 덕분에 회사를 그만두고 근 40여 일만에 책 한 권 분량의 수기를 완성했다. 지금은 글자 수 2000~4000자 칼럼 1꼭지 분량을 하루 한 편씩 무난히 써 내려가고 있다.
몰일 글쓰기의 경험은 걷기에서 시작됐다. 당시 써 둔 글이다. "걷기운동은 퇴사 후 상한 마음과 우울감을 떨쳐버리는데도 도움이 됐다. 걷는 동안 내 안에 숨죽이고 있던 창조성도 콸콸 샘솟았다. 보통은 샤워할 때나 화장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랐다. 그런데 걷기운동을 시작한 후 걷기 전후나 걷는 동안 새로운 영감이 많아 떠올랐다. 복잡한 여러 생각들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덕분에 퇴사 후 책쓰기 주제나 앞으로 할 1인기업 운영방향, 사업 아이템 등을 40일 내 다 정리할 수 있었다."
몰입 글쓰기는 큰 행복감을 줬다. 영감의 보고였고, 생산성도 따라오는 신나는 작업이었다. 걷기와 명상은 몰입의 좋은 수단이다. 관념철학의 아버지 칸트를 비롯해 니체와 몽테뉴도 걸으며 사유에 몰입했다고 한다. '목민심서'를 쓴 다산 정약용도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그는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지금도 다작의 아이콘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걷기로 몰입하며 사상 체계를 완성해가던 그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느껴본다.
최근 집중적으로 글을 쓰면서 또 다른 경험을 했다. 단어 하나하나 세세한 것까지 몰입 작업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주로 글의 큰 흐름, 관련 문장 정도가 떠올랐었다. 몰입 글쓰기의 한 단계 도약을 이룬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고 나서 문득 떠오른 인상을 메모했던 내용이다. "마음의 저항을 뚫고 몰입해 글 한 꼭지를 쓰다 보면 내 삶 전체가 글이 된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가 마음의 틈을 비집고 나오며 아우성 친다. "나는 여기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구요. 저 단어 하고 연결해주세요." 이런 작업들이 쌓이면 어느덧 비워둔 글 중간중간 흰 공백과 물음표들은 신사처럼 깔끔한 글자들로 채워져 있다. 이런 글들을 보며, 내 마음은 어느새 다 자라 한몫하고 있는 장성한 자녀들을 보는 듯한 뿌듯함을 느낀다. 의식이 글을 시작하고, 무의식이 글을 마친다." 생각치도 못 했던 표현, 조사 하나까지 알고 신경 쓰는 무의식에 사뭇 경의를 표한다.
몰입 글쓰기는 쓰는 행위나 문장, 단어뿐만 아니라 글의 발상, 구조화에도 작용한다. 사람들의 관심사, 자신의 글 주제, 흥미를 유발하는 소재 등을 엮어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런 과제를 머리에 입력하고 몰입해 걷다 보면 자동으로 내용이 떠오른다. 구조가 잡히고, 에피소드들이 튀어나온다. 한 편의 글 개념이 잡힌다. 이후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몰입 관련 책을 보다가 좋은 사례가 있어 찾아보았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부유한 지주 레빈의 몰입 체험이다. 낫으로 건초를 베는 요령을 배우며 변화해가는 과정이다. "그는 농부들에게 뒤지지 않아야겠다는 것과 될 수 있는 한 잘 베어야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 레빈은 시간이 가는 것을 까맣게 잊고 이른지 늦은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의 일에는 지금 그에게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창 일을 하는 사이에 그는 어떤 순간들을 발견하게 됐다. 그 순간들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잊어버렸고, 일이 한결 손쉬워졌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그의 두둑도 거의 티트의 그것처럼 반반하고 훌륭하게 베어졌다. 그러나 일단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식하고 보다 잘하려 애쓰기 시작하면, 갑자기 그는 하고 있는 일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두둑도 잘 베어지가 않았다. (...) 한낮의 더위에도 풀베기는 이제 그다지 힘든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온몸을 적신 땀은 그를 시원하게 해주었고, 등과 머리와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올린 팔에 내리쬐는 태양은 노동에 필요한 힘과 끈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그 무아의 순간은 더욱 자주 찾아왔다.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 레빈은 시간이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몇 시간쯤 베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삼십 분쯤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벌써 한낮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 레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얼른 그 장소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 정도로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광대한 풀밭은 베어져서 향기를 풍기는 건초열을 보이면서 비스듬히 비치는 저녁 햇살에 특별하고 새로운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레빈의 체험과 기존 이론을 참고해 몰입의 방법과 유익을 정리해 봤다.
목적의식 : 몰입은 가만히 있을 때 일어나지 않는다. 레빈이 노동한 것처럼 집중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른 잡념을 잊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레빈은 이런 유익을 위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형이나 다른 농부들의 비웃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기 전 풀을 잘 베겠다는 한 가지 목적에 전념했다.
무아지경 : 몰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제대로 몰입해 작업할 때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무의식이 일하게 내버려 둔다. 그 순간 작업 도구가 저절로 일하고, 정확하고 정밀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잘하려고 의식하고 애쓰는 순간 오히려 일이 잘 되지 않는다.
행복감 : 몰입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큰 비결이다. 몰입 자체가 엄청난 기쁨과 만족을 준다. 힘든 작업의 고통을 잊게 한다. 스스로 보람을 찾고, 함께 하는 자들과 일치감을 누리게 한다. 걷기와 명상 등으로 몰입과 여유를 즐기는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취 : 레빈이 몰입해 일하자 다른 일꾼들도 신이 나서 경쟁적으로 풀베기 작업에 동참했다. 하루 만에 거대한 풀밭을 거의 다 베어버렸다. 농노들이 억지로 일했을 때 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거뒀다. 몰입은 눈에 띄는 변화를 이루고 강한 전파력을 가진다. 몰입의 결과물은 만들어 낸 사람에게 특별하다. 애착을 갖게 한다.
레빈은 작업 직후 만난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린 풀밭을 전부 베어버렸으니까요. 게다가 또 난 거기서 얼마나 좋은 영감하고 사귀었는지 몰라요! 정말 얼마나 즐거웠는지 형님은 상상도 할 수 없으실 겁니다!" 몰입할 일을 찾아 이런 기쁨과 결실을 누리자. 영혼의 글 한 편 진하게 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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