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과 중독은 한 끗 차이
이세돌 은퇴대국에 꽂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한국 바둑 인공지능(AI) 한돌과의 승부였다. 바둑 기계를 이긴 유일한 인간이 이세돌의 별명이었다. 지난 2016년 구글 인공지능을 이긴 후 얻었다. 당시는 5판 중 겨우 한판을 이긴 것이었다. 인간의 자부심이 산산이 깨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바둑은 아직까지 인공지능이 넘을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다"라는 말은 그 이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이후 수많은 바둑 기사들이 다시 인공지능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미국, 중국, 한국 등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인공지능은 셌다. '쎈돌' 이세돌이 한 판이라도 이긴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눈을 사로잡은 장면은 기적에 대한 향수였다. 우측 하단에 몰려있는 검은 돌들이 다 죽을 찰나에 이세돌이 묘수를 둔 것이다. 몰린 검은 돌 위 하얀 돌 두 개 밑에 붙인 검은 돌 한 개. 이 수로 검은 돌들은 죽다 살아났다.
상황은 대역전. 이후 AI가 자신이 이길 확률을 예측하는 그래프는 60%에서 20%까지 확 떨어졌다. 그래프 중반 45수 정도 부근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여기까지였다. 인공지능은 기계다운 근면함을 발휘해 다시 인간을 야금야금 따라잡았다. 기계의 계산력을 깨기 위해 인간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상상력을 발휘해 이쪽저쪽 찔러봤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치 인간이 자동차와 경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인공지능 승률 그래프는 113수가 되자 79%를 넘었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결국 181수에서 인간은 돌을 던졌다. 항복했다. 이렇게 이세돌 은퇴대국 마지막 3번째 판은 끝났다.
그럼에도 이세돌은 여전히 위대하다. AI를 이긴 인류 유일의 바둑 기사다. 한돌과의 첫 판도 승리했다. 물론 미리 돌 2개를 놓고 두는 접바둑과 AI의 오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긴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지 않은 길을 만들어 온 그의 도전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어떤 속담처럼 "세상은 갈 길을 알고 전진하는 자에게 길을 비켜준다."
The whole world steps aside for the man who knows where he is going
바둑은 직장 생활만큼이나 인연이 깊다. 오랜 기간 집을 떠났다 돌아오신 아버지의 취미 때문이었을까. 첫 직장 초년생 때 바둑을 배웠다. 바둑은 고달픈 직장생활 중 낙이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또 주말 짬을 내어 두는 바둑은 꿀맛이었다. 기숙사 휴게실 한쪽에서 회사 지인과 마주 앉아 바둑을 즐겼다. 집 말고 밖에서 두는 처음이자 마지막 인간과의 대국이었다. 당시에는 온라인 바둑이 시원치 않았다. 모뎀으로 인터넷에 겨우 접속해 PC통신 바둑을 둘 때였다. 바둑 책을 사서 공부하고 어설프게나마 자체 연구생 시절을 가졌다. 이 시기 또 다른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에도 빠졌다. 삼국지였다. 너무 재밌어 직장 근무 후 거의 3일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몸은 피곤했을 망정 그때 처음으로 몰입하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이렇게 집중할 수 있는 일만 찾는다면 인생 바로 성공한다"라고 확신했다.
바둑은 아버지와 교감하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 했다. 실력이 빠르게 늘어 어느 순간 아버지는 더 이상 상대가 돼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느긋했다면 하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이후부터는 인터넷에서 줄곧 얼굴 없는 상대하고 바둑을 뒀다. 인간적 교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바둑은 그냥 혼자 하는 오락 같았다. 대국 창 전적은 갈수록 쌓였고 어느새 1867승 2013패 22무를 찍었다. 총 3902전에 단수는 1~3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한 판에 최소 30분씩만 잡아도 117,060분, 1951시간, 81일, 3개월을 꼬박 바둑만 둔 셈이다.
어떤 일도 유익한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 바둑도 그랬다. 즐겁게 한 두 판 두던 게 어느 순간 몇 시간, 하루를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재미 보다 승부욕에 사로잡혔다. 지면 성질이 나기도 했다. 내가 바둑을 두는 게 아니라 바둑이 나를 두고 있었다. 통제 불가였다. 이렇게 망가진 마음은 다른 나쁜 습관을 불러왔다. 그러다가 이런 욕구는 어느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러면 또 1년이고 얼마고 한참 동안 바둑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이렇게 바둑은 질긴 생명체처럼 끊길 듯 말 듯 옆을 지키는 취미가 되었다.
사실 생산성을 따지는 입장에서 이런 취미는 필요악이 될 수도 있다. 이 시간에 뭐라도 했으면 어떤 일도 이뤘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핑곗거리는 있다. 바둑의 쓸모다. 먼저 바둑을 두면 몰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승부심과 도전 정신을 일깨워 준다. 대충대충 하는 성격에 정밀한 계산력, 분석적 사고를 더해준다. 판 전체, 큰 그림을 보는 전략적 마인드를 향상한다. 마음에 상상과 창조의 공간을 듬뿍 심어준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시간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낼 수 있다. '강태공'이 될 수 있다. 등등. 그 유익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만들어내자면 그렇다.
그럼에도 반퇴자, 자유 직업인의 오락 생활은 조심스럽다.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 때는 출근이 안전장치였다. 아무리 바둑을 많이 둬도 다음날, 월요일, 회사에 나가 일하면 됐다. 자동 항법 장치처럼 일과 오락의 균형을 잡아줬다. 하지만 독립 생활자에게 이런 안전판은 없다.
그래서 이세돌이 다시 불러일으킨 바둑 영감에도, 한 돌 놓기가 망설여진다.
몰입과 중독은 이란성쌍둥이 같다. 한 끗 차이다. 기제는 같지만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똑같이 순간의 즐거움을 주지만 하나는 창조적이고, 하나는 파괴적이다. 몰입의 창조성은 생산성을 높여주고 삶을 원하는 목표로 이끈다. 반대로 중독의 파괴성은 통제를 허물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삶을 격리한다. 물론 어떤 파괴도 결국 창조의 공간을 넓히는 창조적 파괴가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너무 복잡한 영역이다.
생활의 활력소이자 여유, 창조의 협력자로서
오락을 즐길 준비가 됐는가?
몰입과 중독을 잘 구분하고,
자기 항법 장치를 확신할 때,
비로소 오락은 취미가 되고,
인생을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