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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2-1. 내 나이가 어때서

From. Seoul

by 수지
서울과 모스크바, 6000km 다이어리 두 번째 주제는 '나이'입니다.


To. 상호
나이 먹는다고 어른은 아닌 것 같아.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두려움 마음이 한가득인데 어른이 되면 이런 불안은 없어질까?


어른이 되는 중인 스물다섯


얼마 전 직업인으로서의 군 전역을 앞두고 동생이 복무하는 강원도 고성에 다녀왔다. 나오기 전에 한 번은 다녀와야 한다는 K-장녀로서의 의무감 반에 쉬고 싶은 마음 반을 더해 겸사겸사 좋은 1박 2일 여행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북한 땅이 있을 만큼 워낙에 먼 데다가 단풍 시즌이라는 것을 차마 계산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이 풍요로웠던 것은 그 시간을 채운 대화 때문이었다.


IMG_7981.jpg 설악산 단풍 보고 가시죠~ �


동생과는 여섯 살 차이가 난다. (그 밑으로 늦둥이 남동생이 하나 더 있는데 막내와는 열다섯 살 차이가 난다) 나이 차이가 꽤 있다 보니 우리의 유년시절은 나는 나대로 누나로서 동생은 동생대로 동생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 말인즉슨, 나는 손 많이 가는 어린 동생을 애정 어린 잔소리로 돌보았고 동생은 무엇이든 뚝딱 해내는 누나를 의지하기도 미워하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우리 남매는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싸우며 자랐다. 그렇다 보니 동생이 다 큰 성인이 되어서 어엿한 직업인이 된 뒤에도 내 눈에는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았다. 그런데 웬걸, 이번엔 달랐다. 4년간의 군 생활 내공이 쌓였기 때문일까. 못 본 사이 제법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깊이가 깊어졌다. 아, 내가 서른 하나가 되는 동안 동생은 스물다섯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른인 척하는 서른하나


전역을 하고 나서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동생은 인생에서 처음 스스로 선택한 진로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어린아이 같기만 했던 동생이 의젓해졌다고 생각하게 된 지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는데 이제는 마치 본인의 인생을 책임질 준비가 되었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어쩌면 이후 자기가 헤쳐나갈 일들에 대한 계획적인 브리핑은 이만저만 걱정하고 있을 누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겠지만 나는 그 마저도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야로 첫 도전을 하는 것이기에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세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안심시키는 얼굴 너머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지원아, 새로운 일 하는데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야. 안 해본 거 하는데 걱정 안 하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야? 하나씩 부수어가면서 하면 돼. 너 아직 스물다섯이지? 만약 잘 안되거나 실패해도 겨우 스물여섯인데?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스물여덟이었으면 좋겠는데." 불안에 이불을 덮어준답시고 이 말을 했다. 이런 말로 두려운 마음이 덮어지진 않을걸 알면서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인 척했다.


KakaoTalk_Photo_2022-01-06-21-27-37.jpeg 우리 남매는 사이가 매우 좋은 편 ^_^




어른과 안 어른


인생을 책임지는 연습을 해나가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거라면 동생은 지금 그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게 맞았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서른 하나가 되도록 인생을 책임지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을 책임진다는 건 단순히 경제적, 정서적으로 부모의 그늘을 벗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당면하는 문제라기보다는 (물론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정서적 독립이 포함되긴 하지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정확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선택하여 그대로 살아내는 '리얼 라이프'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여전히 무엇을 위해 살지, 어떻게 살지를 늘 고민하는 그 여정 위에 있기 때문에 굳이 어느 한쪽으로 구분 짓자면 '(완전한) 어른' 보다는 '(아직) 안 어른' 쪽이랄까.

실은 이런 류의 고민에서 진로에 대한 부분은 지극히 일부이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차원의 것이 더 명확하게 그려져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내일 먹고사는 일이 급하다 보니 좀처럼 생각을 게을리하게 되고 막상 이런 문제가 펼쳐졌을 땐 눈앞이 캄캄하고 불안으로 치닫게 되는 것. 요즘 나는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진짜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면 디테일한 진로의 문제를 물 흐르듯 풀리는 마법이 생긴다고 맹신하는 나)




진짜 어른이 되는 길


그러고 보면 나이가 든다고 해서 진짜 어른이 되는 건 아닌 듯하다. 인생을 그려나가는 건 스물셋이어도 선명할 수 있지만 마흔다섯이어도 선명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내게는 이런 친구가 여럿 있다. 물론 본인만이 겪는 고뇌의 사정까지 모두 다 알 순 없더라도 그 삶 자체로 성실히 인생을 책임지고 있는 친구들. 그중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도 꽤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이런 친구들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얼마나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인생을 대하고 있는지 금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치열함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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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늘 하는 말로 "네가 잘되야 내가 잘되고, 내가 잘되야 네가 잘되는 거야"라고 하는데 잘 된다는 건 기대하고 바라는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꼭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진짜 어른이 되는 그 과정을 잘 밟고 있는 것, 하루하루 주어진 과제를 확실한 목표 아래 성실히 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네가 잘되야 내가 잘되고 내가 잘되야 네가 잘된다는 건 "너의 치열함을 내가 닮아가고 나의 성실함을 네가 닮아가는 것,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 진짜 어른은 이렇게 서로 도와가면서 완성된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나의 목표의식은 (종교적 이유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큰 범위에서는 말과 글에 힘이 있는 사람으로 살되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나 나와 비슷한 환경을 사는 사람들에게 내 몸의 건강을 책임지는 법을 가이드하며 이런 삶도 있다고 알려주는 전달자, 전문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선택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야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 꾸준히 해온 것들의 퍼즐을 맞추어보면 내가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확신 중에도 새로운 도전 앞에서 필연적으로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확신마저도 흔들릴 때가 있는데 그 트리거는 바로 내 나이다.

서른 하나는 무엇을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일까. (적어도 이른 나이가 아닌 건 분명하다.) 아주 일반적인 세계에서 서른 하나라면 지금쯤 안정된 직장과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커리어 몇 줄, 튼튼히 쌓아놓은 통장잔고는 필수템이 맞는 것 같다. 이 중에 나는 몇이나 해당될까를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주눅 들 때가 있다. 나는 늘 안정보단 불안정을 선택했고 그 덕에 통장잔고는 상대적으로 덜 튼튼한 것 같아서. 그러나 이러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건 흔들리지 않는 목표의식과 자기 확신 그리고 믿음. 내가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믿는 구석이라도 있으면 늦은 나이, 이른 나이 상관없이 말 그대로 '내 나이가 어때서'가 되는 것이다.


IMG_8399.jpg 이 분이 불렀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른 오승근 님이 그러지 않았던가.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오승근 - 내 나이가 어때서


이 노래를 발표할 당시 오승근 가수의 나이 만 60세였다. 만 60세에도 사랑하기 딱 좋다는데.

돌이켜보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몇 줄은 모두 불안정을 선택한 것에서 쓰일 수 있었다. 만 60세의 딱 절반만큼 산 나는, (당연히) 못 할 게 없다.


근데, 솔직히는 말이야. 말은 이렇게 했어도,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스물여덟이고 싶다.. From.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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