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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2-2.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From. Moscow

by 수지
서울과 모스크바, 6000km 다이어리 두 번째 주제는 '나이'입니다.


To. 수지
나는 왠지 모르게 `나이`가 드는 게 좋더라.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기분이랄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은 했었을 법한 말. 아직도 선명하게 생각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 중 하나는 9살에 맞이했던 어린이날이다. 큰누나가 황금로봇 골드런을 사들고 왔다. 당시 나의 영웅이었던 골드런을 사주던 누나의 모습은 나에게는 너무 멋진 어른이었다. (그때의 누나 나이는 18살, 당시 사정상 누나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었다) 그런 누나를 보면서 어른이 되면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의 책임감도 뒤따르는 것도 모르고.


IMG_0156.jpg 황금 골드런 (출처 : 네이버)


어릴 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대해서 참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어른과 성인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그 미세한 뉘앙스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깨달았다. 만 19세가 되었을 때는 성인으로 인정받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 공식 기관에서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아니다. 성인이 되었다 해서 모두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어른이라고 해서 반드시 성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시간이 비로소 흐른 뒤에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나이의 시점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그에 따르는 책임은 더더욱 회피할 수 없다. 인생에는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몇 번의 큰 결정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것은 아주 사소하게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로서 삶에 나타난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인 당시는 대학교 입학률이 무려 80%가 넘었던 시기다. 대부분의 수험생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대학교 진학은 커다란 산 중에 하나였다. 사실 대학교 입학 준비를 철저하게 못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그 산을 넘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대학은 사회와의 경계가 모호했고,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는 더 이상의 완충지대가 없었다.

나름 원하는 길로 나아가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으나, 꿈과 업 사이의 간극 속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꿈을 좇으라는 성공한 사람들의 말과 현실을 직시하라는 졸업한 선배들의 말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하필이면 성격이 다른 방향의 선택지를 앞에 두고 있어 불안감은 극으로 달했다. 불안감에 사무치던 어느 날, 정말 존경하는 교수님께 SOS를 청했고 북촌에 있는 카페에서 함께 낮술을 한잔했다.


나 :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저의 길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에요. 선생님은 어떤 확신으로 '교수'라는 직업을 선택하셨나요?

교수님 : 나는 운이 좋았어. 좋아하는 것을 빨리 찾았지. 사회에 대해 관찰하는 게 좋았거든. 뭔가를 알아가는 것도 재밌었고. 근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망설이는 거야?

나 : 이쪽 길을 선택했다가, 나중에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떡하죠?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너무 불안해요. 선생님께서는 이런 감정 잘 모르시겠죠?


교수님 : 불안? 나도 불안하지, 당연히.

나 : 선생님께서 불안하시다 고요? 왜요?

교수님 : 에이, 이 사람아. 나도 사람인데. 교수라는 직업이 나의 길이 맞는지, 내 재능과 연구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스스로 질문을 한다. 완전한 건 없다 상호야, 괜찮다. 그때가 아니면 되돌아가면 된다. 불안감이라는 건 늘 함께 하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일단 해보는 거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불안감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벌써 10년도 훨씬 넘은 대화로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딪혀 보렴!”이라는 위안보다 사실 “나도 불안해”라는 답변에서 더 큰 안도감을 얻었었다. 너무 뜻밖의 대답이었고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다. '교수'라는 전문직은 개인의 적성에서도 완벽하게 일치해야만 할뿐더러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만족감이 높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서 위로가 됐던 것 같다. 선생님의 솔직한 답변 덕분인지 그날만큼은 불안감을 술 한잔과 함께 삼켰던 것은 분명했다.




이처럼 어른이 되는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에 따른 책임과 그 기반에 깔려 있는 불안감은 필연적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게 어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 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무지함과 미성숙함은 또 어떡하고? 실수든 고의든 나의 부족함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했던 사람들을 아프게 했고, 결국 그들을 떠나게 한 순간도 많다. 더 옳은 방법은 후회와 아쉬움으로 가득했던 순간들이 지나고 나서야 왜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는 것을.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가 점차 삶에 스며든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삶에 깊고 깊은 주름이 새겨질 때마다 점차 어른이 되어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나이가 드는 게 좋다. 내가 힘들고 불안했던 만큼 내 안의 깊고 깊은 틈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의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시던 교수님의 얼굴에는 같은 시기를 거쳤던 미숙했던 시절의 흔적이 지금의 주름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과연 나는 지금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아직도 흔들리고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을 하고 불안하다. 때론 그저 그런 척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사실 어린이나 어른이나 상처를 받았을 때 느끼는 아픔의 크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그저 비슷한 경험들을 많이 접했고 그저 인내할 뿐이다. 지금도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런 척하며 웃고 지나가는 나의 모습들을 돌이켜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라고 깨달은 선명한 순간이 있다.


첫 번째로 때는 29살, 지방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신촌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로 멈춰 있을 때다. 차가 많이 막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게 됐다. 장거리 운전으로 인한 피곤함 때문이었을까, 붉은 보랏빛 하늘의 노을 때문이었을까? 그 순간 운전석에 앉아있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운전 행위 자체만으로도 엄청 어른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에서야 운전대 앞에 앉으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된다) 노을 감성 때문인지, 목을 조이던 넥타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는 힘들어하는 큰누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28살의 나. 누나에게 참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런 누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울먹이는 누나를 안고 다독이는 것뿐이었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누나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내가 누나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항상 나의 앞에서 나를 지켜주던 누나가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을 만 큼 컸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이 외에도 스스로 어른으로 느껴졌던 적이 몇 번 더 있었겠지만 왠지 모르게 이 두 순간은 굉장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마무리하면서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를 나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어릴 땐, '20살의 나', '30살의 나'와 같이 10년 뒤의 내 모습을 많이 그린 곤 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삶은 원하는 대로 흐르지만은 않았다. 20, 30대가 되어 문득 10대 또는 20대에 적어 뒀던 현재의 나를 마주하면 많이 성장하고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향에 '미달'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이제는 무언가가 되어 있는 어른이 되기보다 나이가 들어도 무언가를 잃어가지 않는 어른이 되고자 한다.


IMG_0157.jpg
사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좋은 건… 예전에는 뭔가 원하는 대로 안 풀리면 좌절과 슬픔, 분노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그저.. "와..^^잣 됐다 " 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 같아…

(근데 이거 좋은 거 맞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rom. 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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