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Ep 3-1. 만나지 않아도 연결되어 있어

From. Seoul

by 수지
서울과 모스크바, 6000km 다이어리 두 번째 주제는 '대화'입니다.


To. 상호
우리가 대화를 할 때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들어. 나만 그러니..? ㅎ


낯가림 인간이 에너지를 채우는 방법


여럿이 모여 mbti를 묻는 시간이 있으면 거의 2/3가 나의 mbti 첫자리를 E라고 한다. 그러다 내가 파워 I라고 대답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란다. 그런 반응의 이유는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가 아마 SNS 상의 활발한 네트워킹이나 실제 만남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역할로 비쳐서인 듯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순간이라도 찾아오면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낯을 가린다.

파워 I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대체로 혼자 있는 시간으로 에너지를 채운다. 나만의 비법이 있다면 최근 나눈 대화를 곱씹는 것. 그날의 대화가 상대를 탐색하기에 적당했는지, 나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었는지, 내 이야기를 해도 안심할 수 있는지 등의 기억을 살려 기록해둔다. 손으로 써 내려가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 이 사람과 내가 더 연결될 수 있을지를 스스로 정해보는데 혹여나 그럴 수 없다는 판단이 서더라도 유익한 시간이 된다. 결론적으론 대화가 나의 에너지를 채우는 셈이다.


D_-0ltkU4AAAZZM.jpeg 난 줄...;;



언택트 대화라는 새로운 장르


최근에는 새로운 방식의 대화로 상대방과 연결되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단어나 문장들이 모여 대화를 이루는 것이겠지만 풍성해지는 건 결국 상대방의 표정이나 눈빛, 공간에서 전해지는 온기,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 덕분이다. 그래서 대화를 곱씹을 땐 ‘말' 뿐 아니라 '그날의 분위기'를 동시에 떠올린다. 그런데 최근에 했다는 새로운 경험이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런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었다.

코로나19 시대가 개막되면서부터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만날 수 없는 건 둘째치고 한 집에 사는 가족들과도 마주하며 식사하는 일조차 조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 일상을 이루는 모든 시스템이 콘택트에서 언택트로 바뀌는 건 기정사실화였다. 처음엔 생소하게만 느껴지던 온라인 화상 프로그램들도 심지어 위드 코로나로 전환되어 사무실 출근을 하게 된 지금도 없으면 안 될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어느 순간 나도 바뀌어가는 이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탑승하여 친구들과도 언택트 대화를 나누는 일에 익숙해졌다. 직접 만나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제일 좋겠지만 온라인에서의 언택트 대화는 그럴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 첫 번째 환경이었다. 가깝게는 회사의 동료들과 업무 관련 이야기를 할 때, 조금 멀리는 세계 각지의 친구들과 안부를 물을 때도 온라인을 통해 네트 워킹했다.

언택트 대화를 하는 법은 딱 두 가지.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마주하지 않는 것. 화상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비디오'기능을 통해 선택적으로 내 얼굴을 공유할 수 있다. 원하지 않는다면 '마이크' 기능으로도 육성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물론 화상 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코로나 이전에도 sns는 이미 소셜 네트워크라는 제 기능을 하고 있었지만 언택트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는 sns로 직접 '집콕 라이프'를 보여주고 더불어 '남들이 어떻게 사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소셜 네트워킹에 동참하는 인구 자체가 훨씬 많아졌다. 누군가 공유한 게시물에 댓글을 달고 더 깊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다면 dm(디렉트 메시지)을 통해 쉽게 말을 걸고 대답을 한다.



바로 앞에 있는 듯한 착각


모스크바에 사는 상호와 서울에 사는 나는 가끔 zoom이나 카카오 페이스톡으로 대화를 나눈다. 음성통화를 나눌 때도 있지만 상호와 이야기를 할 때는 꼭 얼굴을 보고 싶다. 그가 상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본인의 이야기도 잘할 줄 아는 근사한 에티듀드를 장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시각각 변하는 다이내믹한 표정이 너무 생생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더 풍성하고 즐거워지는데 항상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다. 상호의 집에 있는 큰 창 너머로 보이는 모스크바의 계절이 넘어가는 풍경을 비춰줄 때면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쉬움도 금세 잊힌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거 맞아?' 하며 바로 앞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아니지만 온라인이 빚어낸 공간 안에서 함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것이 [서울과 모스크바 6000km 교환일기]의 계기가 되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우린 만나지 않아도 연결되어 있다.


IMG_7459.jpg 언택트 시대 최고의 발명품..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만나지 않아도 연결되어 있는 듯한 감각은 낯선 이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sns가 맺어준 인연, '커피'와의 대화가 그랬다. 새로운 사람을 실제로 대면해서 처음 알아가게 되는 상황이라면 낯가림이 심한 나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다. 평소의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누군가 말을 걸어주지 않을 때까지는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다. 시작은 이러했다. 내가 블로그에 꾸준히 연재하고 있는 '내 꿈은 헬스 깡패'를 비롯 글쓰기 게시물에도 관심 있게 댓글을 달아준 이웃, 커피가 고마워 나도 그녀의 블로그를 염탐했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셀프-러브 마인드로 일상을 살아내는 헬씨 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상단에 최근 게시물 몇 개만 읽어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는데 정체를 알았으니 곧바로 서로 이웃을 추가하고 인스타 계정을 팔로우했다. (그녀는 부계정으로 이미 나를 팔로우해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쭉 dm을 통해 안부를 주고받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걸까. 커피와의 대화는 짤막한 몇 줄에도 늘 기분이 좋다. 결이 맞는 사람들끼리 유대가 생기면 낯선 이도 낯설지만은 아닌 사이가 된다.


https://m.blog.naver.com/tnalsr3718


https://www.youtube.com/channel/UCQRhWZWCuBnSXQMIA7Rz2Pw


(허락받고 공유)



우리 다시 만나리


30년 남짓 인생에 만난 남자 중 가장 멋진 남자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스테판이다. 스테판은 4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서 혼자 떠난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만난 친구이다. 스위스 사람인 그는 긴 세계 여행을 끝내고 리스본에 머물다 바르셀로나로 짤막한 휴가를 온 상황이었다. (지금은 리스본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 고향 친구가 합류하기까지 혼자 여행할 예정이었던 스테판이 마침 나와 같은 호스텔 옆 침대에 묶게 되었고 당분간 혼자 여행을 해야 한다는 점, 불어라는 연결고리로 며칠을 함께 여행했다. 일정 상 내가 먼저 한국으로 떠나야 해서 송별회를 마지막으로 아쉽게 헤어졌지만 미리 교환해둔 연락처 덕분에 지난 4년간 왓츠앱과 인스타그램으로 꾸준히 연락해왔다.

리스본에서 퍼스널 라이프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스테판은 종종 나의 스트레스 안부를 묻는다.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시기일 때면 명상 영상이나 음악을 보내주기도 하는데 요즘 몸에 대한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간단히 시도해볼 수 있는 챌린지를 제안해주기도 했다. 스테판과의 대화로 내 몸에 대한 부정의 감정이 긍정의 감정으로 서서히 변화되었다. 지구 반대편 있지만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의 각자를 내보이면서 서로에게 닿을 수 있던 것이다. 언택트로 나눈 대화라 할지라도 진심은 전해지니까 가능했던 일. 언젠가 살면서 한 번쯤은 리스본에 가지 않을까?


IMG_5385.jpg 송별회 in BCN


서로를 잇는 무수한 점들


'연결'이라는 단어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선'이 떠오른다. a와 b가 이어진 선. 그냥 양극단이 단순히 이어진 것 같아도 제대로 보면 무수한 점들이 이어져 하나의 선을 만든다. 그러니 '무수한 점'이 상대방을 알아본 '결'이라면 '대화'는 서로를 잇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얼마나 많은 점들이 모여야 하나의 선이 될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결이 비슷한 사람들은 언젠가 만나게 된다는 것.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우연이 만들어진다는 것.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게 될까. 그 속에서 '우리'로 맺게 인연은 얼마나 될까. 낯가림 인간이 이런 기대를 하게 되다니. 별 일이다.


역시 낯가림 인간의 최고 안식은 혼자 있는 시간. 지난 대화를 곱씹으며 에너지를 채울 수 있음에 감사를. 용기와 격려를 심는 대화에 함께한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모스크바의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가 궁금해! 러시아 사람들만의 특별한 애티튜드가 있어?
From. 수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Ep 2-2.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