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지 Jun 09. 2022

가족 간에도 최소한의 룰은 필요해

이렇게만 살아주면 좋겠는데

밤 12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들린다.

평소 깊은 잠에 들지 못해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은 편이 나는 잠귀까지 밝다. 그래서 작은 소리에도 유난히 쉽게 잠에서 깨버린다. 그런데 밤 12시가 넘어 겨우 잠들어버린지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들리는 소음에 도저히 이어서 잠을 자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했다.


동생과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집은 투룸이지만 거실이 없는 형태이기 때문에 각 방의 크기가 제법 크고 사이엔 싱크대가 딸린 작은 부엌이 있다. 그래서 방, 부엌, 화장실을 다니는 동선이 단 세 걸음 안에 끝날 정도로 단순하다. 그러니 각 방의 문을 닫아도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될 수는 없는 구조일 수밖에.


샤워하는 소리, 세탁기를 돌리는 소리, 얼음틀에서 얼음을 빼는 소리,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캄캄한 내 방의 허공에서 떠다닌다. 일어나서 잔소리를 할까도 고민했지만 함께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잔소리부터 내뱉는 건 아니다 싶어 일단은 다시 잠에 들기 위해 애를 썼다. 물론 실패했지만. 그렇게 새벽 3시,  반려 휴먼도 잠이 들었는지 그제야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리고 잠이 달아나버린 나는 5시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7시가 되어서 일정을 시작했다.



아, 룰이 필요하다.


아무리 우애가 좋다 해도 이미 10년 넘게 따로 살아온 우리는 각자 삶의 방식이 몸에 배어 있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각자의 집에서 혼자 살았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살려면 어느 정도의 불편을 겪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일 지도 모르겠다. 룰은 서로의 평화를 위해, 상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때마침 반려 휴먼의 서울 입성 기념을 축하하는 파티가 있던 날, 서울 구경을 시켜주리라 큰 맘을 먹고 서울숲의 꽤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동생을 불렀다. 다채로운 비주얼에 맛도 좋은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한 바탕 요 며칠 서울 적응기를 들었다. 서울에 적응하랴, 공부에 적응하랴, 학원에 적응하랴 적응할 일이 천지인 반려 휴먼은 나름의 고군분투로 씩씩하게 하나씩 하나씩 퀘스트를 부수어나가고 있었다.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적응이 빠른 반려 휴먼..)


4월 말, 서울숲의 평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청명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그때였다. 룰에 대한 이야기를 할 타이밍은 바로 지금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나는 휴대폰에 메모 앱을 열었다.




"누나가 생각을 해봤는데, 우리가 같이 살려면 서로 룰이 필요할 것 같아. 지금까지 같이 살지 않았으니까 각자 패턴에 익숙해져 있는데 이 정도만 배려하고 상의하며 지내면 괜찮을 것 같아서 적어왔어."
1. 귀가 시간 미리 알려주고 먼저 온 사람이 그전에 씻기
2. 쓰레기는 꽉 차면 알아서 버리기
3. 휴지, 공과금, 커피, 정수 필터, 욕실용품, 생활용품 등은 생활비로 공동 구매하기
4. 밥 먹고 설거지는 바로 하기


"참-나."


반려 휴먼은 자신이 지켰으면 하는 것을 하나하나 적어  정성이 갸륵하다는 눈빛으로  숨을 내뱉었다. 살림을 합치기 전까지 누나가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고생해왔다는 소식은 전혀 처음 듣는다는 표정 아 보였지만 가족 간에도 룰이 있어야 한다는 것엔 동의를 하는  같았다. 그리고 청소나 세탁에 필요한 욕실용품은 같이 사용하되 세면도구는 각자 취향대로 자기 것을 사용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그건 오케이. 좋았어."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반려 휴먼은 동생이고 나는 누나라는 이유만으로 수직적인 권력관계가 절대 될 수 없고 난 동생을 그렇게 다룰 에너지도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앞으로 합을 맞추어 살아야 할 서로의 반려 휴먼이 아닌가.


사실 서울숲에서의 이 날, 반려 휴먼에게 가장 놀라웠던 점은 6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 마냥 어린애가 아니었다는 것. 앞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알아서 제 할 일을 찾아 해나가고 있는 어른이었다는 것. 그러니 물가에 어린아이 내놓은 것처럼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게 되었다. 나는 그냥 내 한 몸 잘 건사하면 된다. (그렇다고 애가 아니라는 건 아니고..ㅎㅎ)


반려 휴먼과 나는 지금까지  룰을  지키며 살고 있다. 나는 약간의 소음 정도는 이기고 잠을 청할  있는 수면 능력이 향상되었고 반려 휴먼은 우당탕탕의 소음은 더 이상 내지 않는다.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쓰레기가 차면 알아서 내다 버리고 우리 집엔 설거지가 절대 쌓이지 않는다. 매주 당번은 성실하게  청소를 해내어 집안 전체가 더럽게 어지러운 적은 별로 없다.


우리, 이 정도면 꽤 잘 살고 있는 거 아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