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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술희 Nov 22. 2021

나는 다시 뚱뚱한 여자가 되었다


밤 11시 서울역 앞에는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 무리가 정류장 앞 횡단보도를 지킨다. 그중 누군가에게 붙잡혀 “택시 타세요”라는 한마디를 듣기라도 하면 ‘시간도 늦었는데 집 앞까지 편하게 갈까?’ 하는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번엔 갈등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우리 집 가는 505번 버스가 [곧 도착]이 떠버렸으니까. 검은색 캡 모자를 쓴 기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저 막차를 타기 위해 뛰어야만 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뛰어가는 내게 내뱉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그것은 분명 듣지 말았어야 할 소리였다.


"아따, 가시나- 살 많이 쪘네"


처음 들었던 음성은 "택시 타, 아가씨"였다. 신호가 바뀌기만을 발만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그 와중에도 거슬리는 반말과 아가씨라는 단어. 횡단보도 앞에 있던 이들이 모두 남자였던 걸 생각하면 분명 내게 던진 말이 맞았다. 나는 왜 기사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반말을 들어야 하며 '손님, 고객님'도 아닌, 심지어 '저기요'도 아닌 '아가씨'로 불려야 할까. 내가 들은 체 만 체 하며 지나치니 그 검은 캡 모자를 쓴 기사가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한마디를 마지막에 던진 것이다. 늦은 밤 서울역 앞에서 할증 붙은 택시를 타고 꽤 먼 거리를 갈 것 같은 대왕 고객을 놓쳐 아쉬움이 아무리 컸다한들 그건 분명해서는 안 되는 할 말이었다. 집까지 가는 30분 동안 버스에서는 음악을 듣지도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켜지도 않았다. 그저 불쾌함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불쾌함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는 거.




정신이 번쩍 뜨였다는 건 그간 정신이 맑지 못했다는 뜻이다. 다시 며칠 전으로 돌아가 보자. 그날은 이런 일기를 쓴 날이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강박 때문에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써내지 못하거나 스트레스 때문에 음식 앞에서 무너져 내릴 때 너무 슬프다. 몇 시간을 썼다 지웠다 반복해도 어떤 스토리를 들려줘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뒤로는 글을 쓰지 않고 달라진 몸의 모양으로 거울 속 내 모습이 처참하게 느껴진 뒤로는 몸무게를 재지 않는다. 워크보드 위에 흩날리는 단어나 체중계 위에 숫자가 계속되는 실패로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데이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주어진 날들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폭탄처럼 날아오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나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으며 그렇게 된 데에는 모두 내 탓이라는 불편한 메시지들로부터 마음을 지켜내느라 또 애쓰고 있다. 정말 속 사람이 강건하고 싶다.


이 일기를 쓰고 곧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속마음을 털어놓았더니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총체적 난국의 핵심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지운아, 나 너무 내가 안 예뻐서 속상해. 나 거울로 내 몸을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살이 너무 쪄서 몸이 하나도 건강해 보이지 않는 거야.  옷을 새로 사지 않아도 이미 멋지고 예쁜 옷이 가득한데 살이 쪄서 맞는 옷이 없어. 이번 주에 집에 내려가기로 했는데 엄마, 아빠를 볼 낯이 없어서 집에도 너무 가기 싫고.. 자신감이 너무 떨어져. 다 내 탓인 것 같아. 제일 심각한 문제가 이거였네. 내가 내 몸을 싫어하는 거. 내가 너무 안 예뻐. 건강하지 않아. "


통화하는 내내 한 손은 휴대폰을 다른 한 손은 마스크 위로 흐르는 물줄기를 닦아내느라 쉴 새가 없었다. 스타벅스에 사람이 가장 붐빈다는 점심시간에 양복 입은 샐러리맨들이 나를 사연 있는 여자로 볼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순간 나는 사연 있는 여자가 맞았다. 



사연은 이러했다. 위드 코로나가 시행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자리 가늘었다. 평소 약속이 있으면 만날 사람과 장소를 생각하며 그날의 ootd를 정해놓는다. 이런 사소한 루틴에서부터 그 만남이 풍성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다가오는 주말을 위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착장을 고르는데 더 이상 옷장에 있는 옷들 중 지금의 몸에 맞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기대로 한껏 부풀었던 마음은 곧바로 무너져 내렸고 내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자신감은 수직 하락했다. 옷을 꺼내어 입어보고 몸에 가져 다대 봐도 맞는 옷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렇게 나는 거울 속 나의 벗은 몸과 마주했다.

벗은 몸을 거울로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보통 “샤워할 때 안 봐?”라고 묻는데 “응, 안 봐. 씻기도 바쁜데 언제 들여다보고 있어”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인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디 프로필 이후 몸에 좋지 않은 음식들을 쑤셔 넣어 불어난 내 몸을 보면 음식을 통제하지 못했던 스스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붙힐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늘어진 팔뚝, 울퉁불퉁한 엉덩이와 허벅지, 쳐진 뱃살, 브라 밑 튀어나온 등살 그리고 전체를 이루고 있는 내 몸뚱이 곳곳을 직시하고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화면에 비친 거울 밖 내가 거울 속 나를 촬영한 모습은 처참했다. 나는 다시 뚱뚱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날씬'했던 경험이라고는 손에 꼽는다. 체구가 좋은 양쪽 집안의 DNA를 물려받은 탓에 기본적으로 뼈대가 굵고 키가 크다. 게다가 물려받은 건 체형뿐이 아니었다. 언제나 먹는 일엔 진심이었으니 왕성한 식욕도 부모가 물려주신 유산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뚱뚱 혹은 통통 그리고 간혹 날씬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래보다 조금 큰 몸집을 가진 건 창피한 일이다'라는 문제의식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생겨났는데 그건 원하는 옷을 내가 직접 고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 직후부터였던 것 같다. 패션에 관심이 많던 내겐 엄마와 함께 쇼핑을 하러 가는 일은 늘 설레면서도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세상의 온갖 유행을 구경하는 건 너무 기대되는 일이었지만 그중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아내는 건 매번 챌린지였다. 옷가게의 직원들 앞에서는 늘 머쓱하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사방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은 나를 평생 동안 다이어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나는 상처 받게 만드는 건 옷가게 직원들이나 길거리에서 몸을 훑는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가족이나 학교에서 만나는 또래 남자애들로부터 내 몸과 관련된 말을 듣는 순간엔 따갑다 못해 아프다. 그러니 '간혹 날씬'의 시기에는 이런 시선과 말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던 것이다.


살이 찐 사람에게 "왜 이렇게 살이 쪘어. 건강을 위해서라도 운동해야지." 같은 말은 아무리 걱정이 담겼다 해도 전혀 그 사람을 위한 말이 못된다. 살을 빼야 건강하다는 수긍할 수밖에 없는 전인류적 팩트 앞에서 살이 찐 사람은 늘 죄인이 된다. 미디어가 심어준 날씬한 몸매에 대한 환상이 살이 찐 사람은 그저 자기 관리를 못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고 마니까. 


돌이켜보면 나는 이런 강박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피트니스를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낙인찍히는 몸을 부정하고 타인의 말이나 행동이 내 몸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선언하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은  내 몸을 건강하게 책임지기 위해서, 아프고 싶지 않아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수화기 너머 울먹이던 내 목소리에는 날씬해야 아름답다는 내면에 잠재된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어버리는 말과 행동이 담겨있던 것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 아프지 않고 건강하자는 것, 어떤 몸이던 아름답다는 것'이야말로 평생 동안 스스로를 아름답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어왔던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운동이라는 건 사람마다 신체적인 조건과 가진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권유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선 평등하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좌절의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나를 비롯한 모두가 타인의 시선을 경유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내 몸이 아름답다고 여겼으면 좋겠다. 나는 내 몸을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선택했지만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사려 깊은 말 한마디로 자신의 몸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이렇게 마음에 파동이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는 택시기사의 한마디가 큰 역할을 했다. 급히 뛰어가는 찰나에 스쳐 지나간 그 한마디가 뇌리에 꽂힌 데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나는 또다시 뚱뚱한 여자가 되었지만 더 이상 내 몸을 미워하지 않는다. 엉덩이는 커졌고 배는 나왔지만 덕분에 힘이 세졌고 무거운 바벨도 번쩍 들 수 있게 되었다. 등살이 잡힐지언정 얼굴에 살이 오른 덕에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소리도 듣는다. 그렇지만 80살이 되어서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헬스 깡패 할머니가 되려면 아무래도 몸에 쌓인 지방은 걷어내고 근육은 더 유지해야지 싶다. 그리고 할머니가 되어가는 동안엔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말 못 할 고민을 지닌 이들이 위로의 말과 격려의 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도록 끊임없이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의 건강한 일상으로 우리 몸을 책임지는 방법을 제시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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