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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씨걸 Nov 22. 2021

할머니가 되어서도 데님을 입고 싶다


 필요한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무조건 데님 팬츠를 라고 대답할 만큼 데님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가진 수로  사랑이 비례한다고 한다면  데님 애호가 축에도  들겠지만 어릴 때부터 이어진 데님에 대한 애정은 현재에도 여전하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예정이다. (양말만큼)

이유는 간단하다. 데님은 패션에 있어선 클래식, 스탠더드, 스테디, 베스트까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이템이니까. 트위드 재킷과 할 하나를 매치하면 클래식, 블레이저 하나를 매치하면 스탠더드, 맨투맨 같은 베이식 아이템에도 찰떡이고, 오픈마켓 사이트 팬츠 섹션에서도 결국 1.2위을 다투는 건 데님 팬츠다. 핏, 컬러, 워싱은 얼마나 또 다양한지 '이 세상에 같은 청바지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니 하나로도 여러 스타일링을 할 수 있는 동시에 여러 개가 있다면 다양한 스타일에 도전해볼 수도 있는 전천후 아이템인 셈이다. 이것만으로 이미 데님과 사랑에 빠질 이유는 충분하다.



출처 : celine 21 f/w




어렸을 적부터 튼실한 체형이었던 나는 옷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수 있는 옷은 늘 제한적이어서 입고 싶은 옷과 입을 수 있는 옷은 항상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옷차림에 눈을 뜨던 유년시절, 최고 유행하던 리바이스나 에비수 청바지를 제대로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결국 엄마를 졸라서 하나 입어 본 리바이스 501도 원하던 핏이 아니라 입을 수 있는 사이즈를 골라 입었다. (그때 그 시절 리바이스가 요즘 다양한 콜라보로 재기에 힘쓰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그래서 항상 ‘내가 날씬해진다면...?’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할 때마다 화이트 셔츠 한 장에 데님 팬츠를 무심하게 입은 룩을 가장 먼저 떠올리곤 했다. (지금도 이 룩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멋진 아웃핏)

플레어진 (나팔바지보단 덜, 부츠컷보단 더한 바지 밑단), 보이프렌드 진 (남자 친구의 바지를 입은 듯한 넉넉한 핏), 스키니진 (몸에 착 붙는) 등 말하기 시작하면 그 나열이 끝도 없을 데님 핏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스트레이트 핏. 일자로 쭉 떨어지는 바지는 레귤러 사이즈로 입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멋이 흐른다. 몸의 라인이 과하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활동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품이 남아 그렇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스트레이트 핏도 모두가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허벅지부터 골반 그리고 엉덩이까지 살이 많은 체형은 종아리 위에서부터 걸려버리거나 사이즈를 하나 혹은 둘 키워 입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십중팔구 상상하던 핏이 나오지 않는다. 평생을 탄수화물과 친구였던 나는 복부나 하체에 체지방이 밀집되어 있던 터라 그토록 선망하던 스트레이트 핏 진과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늘 멀리서 바라만 보았을 뿐.



다이어트에 성공한 후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팬츠 선택에 자유로워졌다는 것. 지금은 27-28 사이즈 정도가 되어서 웬만한 브랜드의 바지는 모두 입을 수 있다.( 브랜드의 따라 다른데 27이 큰 곳도 있다..ㅎ) 라코스테의 36 사이즈 데님을 드림 팬츠로 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그 바지가 크고, 코스에서 처음으로 34 사이즈를 피팅하던 날 허리가 남아서 느꼈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디자이너 브랜드는 s, m으로 두 개의 사이즈만 나오는데 키가

큰 편인 나는 이런 경우 대부분 m을 입으면 원하는 핏과 기장으로 입을 수 있다. 덕분에 요즘엔 꿈에 그리던 스트레이트 진을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약간의 삼천포이지만, 글로벌리한 브랜드가 아니면 두 사이즈로 나오는 디자이너 브랜드들에 대한 불만이 있다. 동시에 다양한 체형의 모델을 쓰는 브랜드들에 대한 존경심도 있다. 다양한 사이즈의 옷을 만들어내는데 들어가는 비용 대비 수요가 많지 않아 그럴 수 있겠다만 체형 때문에 옷을 고를 때마다 애먹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해주는 브랜드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너무 마른 모델들이 입은 옷들은 결국 지극히 평범한 체형의 사람들도 그 느낌을 살릴 수 없다. 더불어 한국 브랜드는 한국인 모델을 쓰자. 모델도 결국 유행이라서 어떤 모델 한 명이 인기가 많을 땐 비슷한 느낌을 가진 브랜드들은 모두가 다 그 모델과 작업해서 룩북을 볼 때마다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소비자는 타 브랜드들과의 차별을 느끼기 어려울뿐더러 워낙에 본인과의 다른 체형으로 인해 선택을 망설이게 된다.)



스스로 생각할 때 데님을 입어서 가장 빛나는 사람으로 배우 윤여정을 꼽겠다. 70대가 되어서도 사복패션이 늘 화제인 그의 패션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실 별 거 없다. 포멀 한 블랙 니트 하나에 데님 팬츠 그리고 편한 스니커즈를 신고선 시크한 선글라스나 스카프를 걸쳐주는 정도로 포인트를 주었을 뿐. 그런데 왜 이렇게 멋진 걸까. 핀터레스트에서 데님룩을 검색해보아도 외국의 그 어떤 젊은 셀럽들보다 고고하면서 아름다운 위용을 뽐낸다. 왠지 그녀의 옷장엔 심플하지만 좋은 옷들이 간소하게 있을 것만 같다. 다른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것들을 잘 구비해두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집을 나설 것만 같달까. 그의 인격이나 성품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각종 인터뷰나 영화 그리고 윤식당, 윤스테이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소박함, 상대방을 웃게 할 줄 아는 유머, 나이 든 어른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어른 다움 같은 것들이 그녀의 정갈한 옷차림과 어우러져 '흐르는 멋'이 철철 흐른다. 노력하지 않는 '흐르는 멋' 이야말로 가장 멋스럽다. 며칠 전엔 미나리에서 할머니 역할을 맡았던 그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한국 배우 최초로 노미네이트 되었다는 소식이 전국을 휩쓸었다. 노미네이트 되었단 것만으로도 엄청난 쾌거이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60년 가까운 연기 인생이 70대가 되어서 더 활짝 피었다는 사실에 감동스러웠다. 이후 찾아본 각종 인터뷰에서도 영어로 말하는데도 느껴지는 감각적이면서 겸손한 태도는 어떤 할리우드 배우보다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가장 이상적인 할머니의 모습이랄까.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성실, 자연스러움, 소박함이 인생을 말해주는 사람.





봄이 되면서 장만한 엔오르의 데님 팬츠를 입고 출근하던 날, 밑단의 슬릿 사이로 슬쩍 보이는 크림색 컬러의 부츠와 다리가 엄청나게 길어 보이는 핏이 맘에 들어서 자신감 넘치게 경의선 숲길을 걸어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어려운 일이 있던 날이었는데 무엇이든지 가볍게 넘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걸음걸이로. 평소 전날 입었던 옷을 다음날까지 연이어 입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데 그때 그 팬츠가 주는 그 기분이 너무 좋아서 다음날에도 또 입고 그렇게 걸었다. 딱 맘에 드는 데님을 만나면 이렇게 없던 자신감과 용기가 생긴다.


인생을 살면서 40이 되어도 50이 되어도 60-70이 되어도 고민 없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장르만 조금씩 달라질 뿐 매 순간 계속되겠지. 그런 순간에도 나는 '이쯤이야, 이렇게 하면 되지'라고 쿨하게 넘길 수 있는 담대함을 지닌 어른이 되고 싶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쿨하게 넘기거나 더 심각하게 빠지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이왕이면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로 사는 어른이. 그런 할머니라면 분명 몸에 꼭 맞는 멋진 데님을 입고 있을 것 같다. 조곤조곤하게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는 우아한 할머니.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데님을 입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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