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의 편지

스무 번째 보내드립니다.

by 수지

안녕하세요, 친구 여러분. 수지입니다.

조금 늦은 8월의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조금이 아니고... 많이 늦었죠! 원래 저의 목표는 생일이었던 9월 2일에 맞춰서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는 게 목표였는데, 인생이 언제나 그렇잖아요. 변수의 연속. 8월도 그렇고 9월도 그렇고 내내 변수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잊지는 말아야지, 짧게라도 써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펼쳤습니다.


https://brunch.co.kr/@suuuuuuzy/63



8월의 이야기


저의 8월의 소식을 듣는 가까운 지인들 모두 하나같이 입 모아 한 소리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힘이 드니.. 여름.." 저의 어려운 상황들을 접하시고 나서 다들 혀를 찬 거죠. 그냥 소식을 전한 것뿐인데도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저의 8월은 여전히 시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자아와 그냥 나 사이의 중심을 지키는 것이 꽤나 어려웠고요. 지금도 그 균형을 맞추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 기준에서는 균형을 맞추는 일에 에너지를 쓸 힘도 없다에 가깝긴 합니다. 많이 바쁘거든요!



8월의 근황


8월 한달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차려 보니 지나 있었어요. 고대하던 원데이 클래스를 잘 마쳤고,(다시 한 번 기꺼이 시간 내어 와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기도 했고, 허리를 다쳐서 구부정한 할머니가 된 것처럼 허리를 펴고 다니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챌린지가 있었고 회사 밖에서는 '이 타이밍에 굳이 이런 일이?'라는 생각이 들만한 일을 경험하면서 골치가 좀 아프기도 했죠. 허허. 그런데도 쉬는 날에는 미루던 일들을 하기도 하고요. (긴 머리를 단발로 잘랐습니다!) 몸과 마음이 쉴 틈 없이 분주했습니다.



8월의 사랑


8월의 사랑은 모순적이게도 상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여름에 가장 큰 일이라고 한다면 막내 이모를 떠나보낸 일일 거예요. 광복절 전 날 밤 엄마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이모가 많이 아파서 입원해 있어. 간암 말기인데 혈액으로 전이돼서 고치기는 힘든 상황이고 병원에서는 일주일 남았다고 한다."
"................. (울음)"
"엄마가 예전부터 말 못 한 건 이모 뜻이야. 이모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했어. 엄마가 여름 내 간호했는데 최근에 너무 심해져서 충대병원에 갔거든. 엄마가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이제야 정신 났다. 엄마라도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엄마, 이모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울지 마 수지야. 너 울면 엄마도 울라 그런다."
"엄마, 여름 내 얼마나 고생을 했어.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비밀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나한테 말하고 싶었을 텐데."


광복절 아침에 곧바로 충북대병원을 향해 달려갔고, 누워있는 이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간암 말기 환자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어른이 되고 나서는 가까운 사람의 병환, 위독함, 죽음은 완전히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것을 넘어서서 많이 놀랐던 것 같아요. 특히 간암의 경우는 온몸에 황달끼에 생겨서 노란 모습이 됩니다. 이모는 이미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옆을 지키던 엄마는 의연해 보였지만 속은 말이 아니어 보였어요.


이모는 우리 가족과는 연이 깊습니다. 육 남매의 막내이자 어렸을 적부터 바로 위의 언니였던 엄마를 졸졸 쫓아다녔대요. 엄마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 이모가 떼를 쓰며 가방을 집어던지면 그 가방을 주워다가 학교에 데려다주며 막내 이모를 키우다시피 했고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에 살면서 수도 없이 같이 식사를 했고 아빠도 처제를 끔찍이 아끼며 집에 좋은 게 있으면 항상 챙겼었어요. 엄마와는 10년 넘게 같이 일을 했기 때문에 1-2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붙어있었고, 저는 엄마와 통화할 일이 있으면 자동으로 이모의 소식을 들었었어요. 그래서 제가 집에 뭘 사갈 때는 늘 이모네도 챙기곤 했었거든요. 그러니 가족 중에서도 아주 가까운 사이이죠.


"동생아, 우리 동생이 제일 사랑하는 조카 수지 왔어. 수지가 사랑하는 이모 보러 왔네."


말을 하고 싶어도 소리를 낼 수 없어서 입을 뻥끗하거나 눈빛으로 전하는 것이 전부였던 이모의 눈에 눈물이 맺혔고 결국 저도 눈물을 한 바가지 쏟으면서 이모에게 "사랑해"를 연실 외치고 손을 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엔 그 옆을 지키며 "이모, 우리한테 우리 엄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라고 물었을 땐 끄덕끄덕 하시더라고요. 저는 이런 장면을 모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광복절 다음날이었던 토요일엔 당직 근무로 이른 새벽 서울에 올라왔고, 일요일이 되던 새벽에 이모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남아있던 휴가를 급히 쓰고 바로 청주로 내려갔어요. 이모를 잘 보내드리고, 가족들을 잘 돌봐야 한다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요.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에는 쏟은 눈물에 비할 수 없는 감사함도 많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는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던 엄마가 집에만 오면 제 앞에서만 눈물을 쏟아 내는데 제가 감히 그 심정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요. 성인이 되면서는 교류할 일이 별로 없었던 외가 식구들과 오랜 시간 교제하면서 근황을 나눌 수 있던 것도 감사했고요. 엄마가 집을 챙기지 못할 때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던 것도 감사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이 상실감이 오래가서 애도의 시간을 가지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3주 정도가 지났지만 떠올릴 때마다 믿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고 저보다도 몇 배는 더 힘들 엄마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 시간을 잘 보내려고 많이 애쓰고 계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이 들여다보기, 전화 자주 하기밖에 없지만 그거라도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작년에는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꿈꾸며, 전화를 그만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던 저인데.. 이제는 제가 먼저 전화해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사랑받고 있던 감정을 엄마에게 제가 주고 싶어서요. 슬플 때마다 울고 싶어 할 엄마에게 언제라도 나에게 전화하라는 말을 한 번이라도 더 하고 싶어서요.



8월의 태도


8월은 정면 박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들이받았다는 게 아니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솔직해지는 선택을 했어요. 저는 갈등에 취약하고 일단 갈등이 생겼다 하면 바로 스트레스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마저도 취약해요. 좋은 게 좋은 거 하면서 잘 넘어가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회피하는 것 제일 싫어하고 정면으로 부딪혀요. 혼자만의 일이든 상대와의 일이든 가리지 않고 일단 펼쳐놓습니다.

이번 8월에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회오리와 누군가와의 갈등 모두에서 어떤 것이 문제였는지, 그래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내가 (혹은 상대가) 잘못한 것이 있는지, 환경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있는지 등을 많이 고민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럿 만들었습니다. 대화를 청하기도 하고, 편지를 써보기도 하고요. 대신 이런 활동들의 결과가 늘 기대하던 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만으로 더 좋은 거라면, 후회 없는 선택이 더 유의미한 결과를 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어떤 친구는 "이번에도 수지다운 선택을 했네." 라며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저의 이런 방식이 '저 다운'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저를 위해서도 상대를 위해서도 늘 같은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솔직해지기, 손을 내밀기, 대화해 보기. 같은 게 그냥 저의 마음가짐이고 태도인 것 같습니다.



8월의 건강


급성 디스크로 한 일 주간은 꼼짝없이 허리를 펴지 못한 상태로 다녔습니다. 8월의 꿈은 직립보행이라고 인스타그램에 8월 포토메모리를 남겼지만 진짜 심각했어요. 하하. 청주에서 서울로 복귀하자마자 찌뿌둥한 몸을 깨워낸다고 운동을 했는데, 케틀벨 스윙을 하다가 갑자기... "어?" 하는 느낌이 나더니만 허리가 그대로 아작이 났습니다. 무거운 걸로 한 것도 아닌데.. 그 길로 병원엘 갔습니다.


"디스크가 원래도 있는 분인데, 이번에 급성 디스크가 터졌다고 보면 돼요. 지금 관리 안 하면 만성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관리를 잘해야 해요. 앞으로 최소 한 달간은 운동이며 요가며 안됩니다. 그냥 누워만 있어야 돼요. 이번에는 말 들으셔야 돼요."

원장님의 목소리와 표정이 꽤 단호했어요. 저번에 손목 힘줄이 끊어졌을 땐 요가를 계속했었거든요. 살살했든 어쨌든 그걸 아셔서 하시는 말씀이었죠. 아무래도 허리는 겁이 좀 나더라고요. 손목 때도 큰 걱정으로 시름시름 앓았지만 뭐랄까 허리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사실상 허리를 아예 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운동을 꿈꾸는 것 자체가 오만이기도 했어요.


일주일에 두 번은 꼬박 충격파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5회 차 정도 진행되어서 이제는 허리를 펴고 잘 걷고 있어요. 가끔씩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할 때는 통증이 조금 느껴질 때도 있어서 아직까지는 무리를 최대한 안 하려고 하는데 이모저모 일들로 뜻처럼 잘 되진 않고 있습니다. 그건 그거고 요가를 못한다는 게 제일 속상해요. 스트레칭도 안된다 하셨으니 요가원 근처는 얼씬도 못하고 있습니다. 더 오랫동안 행복하게 요가를 하기 위한 처방이라고 생각하며 극복하고 있어요! 여하튼 건강이 제일입니다.



9월은


"나 지금 행복한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오래간만에 친구와의 약속 일정을 잡으면서 이 날도 안되고 저 날도 안 되는 저에게 "수지를 잃었어." 라고 말하는 카카오톡 메시지의 문장을 읽고 속이 상하더라고요. 바빠서 못 만나니까 하는 말이 아니라, 제가 어떨 때 가장 행복하고 반짝거리는지 잘 아는 친구가 하는 말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으니까 참 그렇더라고요.

저에게 있어 행복은 친구들과 관계하고 어울리거나 일에서의 작은 성취감을 느끼거나 삶의 루틴을 잘 챙겨내는데서 오는데 이런 것들이 무너지면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일요일에는 눈물범벅으로 보내는 일이 잦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다시금 찾아 해보려고 해요. 시간을 쪼개서라도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일할 때의 불편들을 해결해보려고 하고 운동은 할 수 없어도 아침에 가벼운 산책으로 걷기 명상을 하는 것 같은 일들을 하나둘씩 해보고 있어요. 어찌 보면 행복해지기 위해 이런 행위들 마저도 퀘스트 깨듯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7월의 편지 말미에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글을 썼다는 게 놀랍습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동일하지만 빠르게 간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제 속도 맞춰서 저에게 좀 다정하게 있어줄래요. 기다리고 수렴하며 저에게 다정해지는 9월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이 아닌 유튜브 콘텐츠 하나를 선물로 드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25.09.08.

수지 드림.


https://youtu.be/nkc8tVCxZKM?si=f4bstTikXEWKKQ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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