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두 롤의 시간,
겨울의 제주와 올림푸스 펜

OLYMPUS PEN-EE2

by hong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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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은 예고되었고, 장소는 제주였다


권태는 소리 없이 내려앉는 먼지와 같다. 매일 닦아내지 않으면 어느새 마음의 가장 투명해야 할 창문마저 뿌옇게 흐려놓는다. 사진이 손에 잡히지 않던 시기가 딱 그러했다.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보는 일이 더 이상 가슴 뛰는 발견이 아니라, 의무적인 기록이나 습관처럼 느껴지던 날들.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 끝에서 경쾌한 진동이 사라지고, 그저 무미건조한 기계적 마찰음만이 남았다고 느낄 때쯤이었다.


지인의 생일 파티 초대장은 바로 그 무렵에 도착했다. 장소는 제주.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곳.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떠나기에는 다소 과분한 거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함’이 오히려 나에게는 절실했다.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강력한 원심력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그 초대를 핑계 삼아 도망치듯 짐을 꾸렸다. 이것은 축하를 위한 여행이자,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구조 신호였다.


이제 제주는 관광지가 아니다


제주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은 예전과 다르다. 한때 그곳은 육지 사람들에게 이국적인 야자수와 에메랄드빛 바다가 넘실대는 미지의 낙원이었다. 하지만 저가 항공이 버스처럼 오가고, 수학여행과 워크숍으로 닳고 닳은 지금의 제주는 서울의 연장선이거나 부산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이 주는 설렘은 희석되었고, 관광지로서의 신비감은 옅어졌다.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치열한 미각의 전장(戰場)이다. 제주의 검은 현무암과 거친 바다가 키워낸 식재료 위에, 전 세계의 레시피가 덧입혀진다. 해산물 파스타와 흑돼지 타코, 감귤을 넣은 칵테일이 공존하는 곳. 이제 제주는 눈으로 보는 관광지가 아니라, 혀끝으로 기억되는 거대한 식탁이 되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명확했다. 섭지코지를 걷거나 성산 일출봉을 오르는 고행은 목록에 없었다. 우리는 생일 파티라는 명분 아래, 제주의 식탁을 점령하러 가는 미식 탐험대였다. 그리고 나는 이 탐욕스럽고도 즐거운 여정을 기록할 도구를 선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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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음식을 고르는 장면 흉기를 찾는중이 아니다.


여행에 가져갈 카메라를 고르는 일


여행을 앞둔 사진가의 가방은 언제나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한다. 제주의 푸른 하늘과 바다를 떠올리면 으레 콘탁스(Contax)의 투명한 렌즈가 생각났다. 그 쨍하고 깊은 색감으로 제주의 빛을 담아오고 싶다는 욕심. 하지만 그 욕심의 무게는 물리적인 무게로 치환되어 어깨를 짓누른다. 이미 서브로 챙긴 디지털카메라만으로도 가방은 묵직했다.


사진 권태기에 빠진 사람에게 무거운 장비는 짐일 뿐이다.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어깨의 통증이 먼저 찾아온다면, 그 여행은 기록이 아닌 노동이 된다. 가볍게, 더 가볍게.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필름의 맛을 잃지 않은 카메라는 없을까. 책상 위를 뒤적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작고 낡은, 장난감 같은 올림푸스 펜(Olympus PEN) EE2였다.


하프 프레임이라는, 여행을 위한 구조


올림푸스 펜 시리즈는 카메라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필름 한 컷(36mm x 24mm)을 반으로 쪼개어(18mm x 24mm) 사용하는 하프 프레임(Half-frame) 카메라. 일반적인 36방 필름 한 롤을 넣으면 무려 72장, 아니 필름 처리에 따라 76장까지도 찍을 수 있는 괴물 같은 효율성을 자랑한다.

3박 4일의 여행. 필름 두 롤만 챙기면 150장에 가까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필름 값이 금값이 된 이 시대에, 셔터를 누르는 행위에 대한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절반으로 줄여준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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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녀석의 크기는 요즘 나오는 대형 스마트폰보다 작고, 무게는 주머니에 넣어도 처지지 않을 만큼 가볍다. 상단 핫슈에 손가락만 한 미니 스트로보를 달면, 어두운 실내나 밤거리에서도 나름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완벽한 화질은 필요 없어. 그저 이 순간의 분위기만 담으면 돼." PEN EE2는 나에게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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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풍경


셀레늄 노출계가 살아 있다는 것


내 손에 들린 PEN EE2는 세월의 풍파를 정통으로 맞은 듯 외관이 험하다. 곳곳에 찍힌 자국과 벗겨진 페인트는 이 카메라가 거쳐온 수많은 주인을 짐작게 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심장은 살아 있었다. 렌즈 둘레에 박힌 올록볼록한 유리창, 바로 셀레늄 노출계다.


이 카메라는 배터리가 필요 없다. 빛 그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노출을 측정하고 조리개를 조절한다. 반세기 전의 기술이 여전히 작동한다는 사실은 묘한 안도감을 준다. 디지털 회로가 끊어지면 죽어버리는 현대의 기계와 달리, 빛만 있다면 언제든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아날로그의 생명력.


조작법은 단순함을 넘어 무심하기까지 하다. 셔터 속도는 1/200초(어두우면 1/40초)로 고정되어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ISO 감도를 설정하는 것뿐이다. 그 나머지 모든 것은 카메라가 알아서 한다. 만약 빛이 부족해 사진이 찍히지 않을 상황이라면? 뷰파인더 안에서 붉은색 투명 플라스틱이 혓바닥처럼 쑥 올라오며 셔터가 눌리지 않는다. 일명 '혓바닥'이라 불리는 노출 부족 경고다.


"지금은 찍지 마. 너무 어두워. 나중에 후회할 거야."


그 붉은 혓바닥은 카메라의 거절이 아니라, 실패를 막아주려는 오래된 친구의 조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ISO 400 감도의 필름을 준비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작은 플래시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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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속에 도착한 제주


대구공항의 대기실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들뜬 공기와 돌아오는 사람들의 피로한 공기가 섞여 미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항공기 연결 문제로 출발이 한 시간 지연되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기다림 덕분에 제주의 활주로에 발을 디뎠을 때, 하늘은 가장 드라마틱한 보랏빛과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으니까.


호텔에 짐을 풀기가 무섭게 우리는 거리로 나섰다. 밤의 제주는 낮보다 화려했다. 미리 검색해 둔 식당들을 메뚜기떼처럼 휩쓸고 다녔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돔베고기, 윤기가 흐르는 고등어회, 향긋한 와인이 쉴 새 없이 오르고 내렸다.


나는 한 손에 젓가락을, 한 손에 PEN EE2를 들고 있었다. 실내 조명은 필름 카메라에 가혹한 환경이다. 붉은 혓바닥이 수시로 올라오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주머니 속의 작은 플래시를 터뜨렸다. '팡-' 하는 짧은 섬광과 함께 찰나의 순간들이 필름 위에 각인되었다. 고감도 디지털카메라처럼 매끄럽고 선명하지는 않겠지만, 그 거친 입자 속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접시 소리가 함께 담길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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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순간들, 그리고 카메라


여행 내내 나는 이 카메라가 가진 한계와 싸우는 동시에, 그 한계를 즐겼다. PEN EE2의 최소 초점 거리는 1.5미터다. 요즘 스마트폰처럼 음식에 들이대고 접사를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나는 의자 뒤로 몸을 한껏 젖히거나,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쳐야 했다.


하지만 그 거리두기가 오히려 좋았다. 음식 하나에 집중하는 대신, 음식이 놓인 식탁의 풍경을, 그 음식을 먹으며 웃고 있는 친구의 표정을, 창밖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을 함께 담게 되었다. 1.5미터라는 제약은 나에게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가르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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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친구들


광각 28mm(35mm 환산 시 약 40mm) 렌즈는 좁은 골목길과 넓은 바다를 모두 포용했다. 아침의 부드러운 사광이 구시가지의 낮은 지붕들을 훑고 지나갈 때, PEN EE2는 놀라울 만큼 차분하고 진득한 색감을 보여주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에서 발견한 의외의 깊이감. 그것은 최신형 렌즈가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맛이었다.


포기해야 할 것, 받아들여야 할 것


여행에서 돌아와 현상소를 찾았다. 며칠 뒤 받아본 스캔 파일 속에는 제주의 겨울이 담겨 있었다. 초점이 살짝 나간 사진도 있었고, 플래시 광량이 부족해 어둑하게 나온 사진도 있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내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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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매끈하게 보정된 관광지 홍보 사진이 아니라, 진짜 우리가 있었다. 흔들린 사진 속에서 우리는 웃고 있었고, 거친 입자 속에서 제주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시들해졌던 사진에 대한 열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대단한 작품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그저 걷고, 보고, 누르는 행위의 즐거움을 되찾았다. 고작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카메라 하나가, 그 낡고 투박한 기계가 나를 다시 사진의 세계로 불러들인 것이다.

L1030268 복사.jpg 일본 인디 밴드 같은 단체샷


이름만 남은 보급형이라 불려도 좋다. 누군가는 장난감이라 폄하해도 상관없다. 적어도 이번 겨울, 낯선 제주라는 시공간 속에서 올림푸스 PEN EE2는 나에게 최고의 여행 파트너였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 작고 반쪽짜리 세상이, 나에게는 온전한 위로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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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천과 탑동 방파제 인근 알록달록한 담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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