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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카메라,
그러나 결코 작지 않은 기억

올림푸스 PEN EE-2 - 011

by hongrang

1968년에 발매된 올림푸스 펜 EE-2. 겉모습은 단정하고 소박하지만, 내면에는 오래된 기계 특유의 완성도와 깊이가 숨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속 모델인 EE-3보다도 내구성과 만듦새 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가장 잘 만들어진 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명기 중의 명기다.


이 작은 카메라는 반 세기를 훌쩍 넘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렸다.

그만큼 개체 수도 많고, 고장도 흔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카메라는 고쳐 쓰기보다 새로 들이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쁘니까. 작고 귀여운 생김새와 혓바닥처럼 생긴 빨간 노출 인디케이터는 이 카메라를 마주한 이들에게 묘한 애정을 느끼게 만든다.

처음 펜을 들고 셔터를 눌렀을 때,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던 미묘한 저항감—그것이 이 카메라의 언어다.

‘혀가 올라오면 살아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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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처음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전면 노출계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셔터를 눌러본다. 파인더 안에 빨간색 반원형 아크릴판이 솟구치듯 올라오면, 살아 있는 펜이다. 이 ‘혀’ 하나 때문에 펜을 수집하기 시작하는 이들도 많다. 나 역시, 첫 만남은 그러했다. 일본 옥션에서 무더기로 섞여 들어온 정크 박스 속에서, 유독 한 대만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것이 EE-2였다.


그날 나는 외출을 나섰다.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살아 있었다. 흑백 필름 한 롤을 조용히 장전하고,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펜과 함께 골목으로 나갔다.


찍찍찍찍—촥.

스크린샷 2025-04-06 오후 5.47.09.png 해지는 맑은 날의 풍경
스크린샷 2025-04-06 오후 5.48.27.png 흐린 날의 부족한 노출 또한 사랑스럽다.

셔터음은 마치 장난감 같다. 기계적이지도,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1/40 혹은 1/200 두 가지 속도 중 하나로만 찍히는 이 카메라는 빛이 많은 날엔 조리개 11이나 16에 놓고 찍는 것이 안전하다. 실내나 야경, 음식 사진엔 어울리지 않는다. 최소 초점 거리 1.5m. 하지만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 있다.


바로 ‘하프’라는 포맷.

36컷 필름 한 롤로 72컷을 찍을 수 있는 경제성은 말할 것도 없고, 나란히 놓이는 두 장의 사진은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게 한다. 같은 피사체를 두 번 바라보고, 다른 앵글이나 시간차를 두고 다시 담아내는 그 과정이 이 카메라의 진정한 재미다.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고 구성하며 한 장면 너머의 또 다른 장면을 엮어낸다.


나는 그런 사진들을 4x5 인화지에 나란히 배치해보곤 했다. 하루 한 롤을 다 찍지 못할 만큼 느린 템포, 하지만 그만큼 농밀한 몰입. 펜은 내게 그런 사진 습관을 만들어줬다.


스크린샷 2025-04-06 오후 5.46.29 복사.jpg 2장의 배치


비 오는 날, 오래된 한옥이 많은 시골 마을을 찾아갔다. 늦은 오후, 조용하고 흐린 빛 속에서도 부담 없이 셔터를 눌렀다. 하프 포맷 특유의 흐릿하고 부드러운 디테일이 오히려 그날의 분위기를 더 잘 담아주었다. 선명하진 않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더 오래 남는다.


펜 시리즈는 사실 마이타니 요시히사라는 한 카메라 오타쿠가 만든 기적이었다. 당시 막내 엔지니어였던 그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6000엔이라는 예산 안에서 ‘라이카의 서브 카메라’를 꿈꾸며 자유롭게 설계했다. 그의 배려는 노출 자동, 셔터 자동, 그리고 하프라는 발상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그 덕분에 지금도 이렇게 작고 다정한 기계를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스크린샷 2025-04-06 오후 5.47.23.png 1.5미터의 초점거리지만 충분히 재미있는 사진을 연출한다.

2023년 펜탁스가 하프카메라 신제품을 내놓았고, 후지는 2025년 5월 세로 포맷 카메라를 발표할 예정이다. 하프카메라가 단순히 레트로 열풍이 아닌, ‘다시 생각하고, 다시 찍는’ 감각을 불러오는 매체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올림푸스 펜 EE-2. 완벽하지 않아서 좋고, 작아서 다정한 이 카메라. 나는 오늘도, 어떤 장면을 두 번 바라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오래된 기계를 꺼내든다.

스크린샷 2025-04-06 오후 5.46.43.png 흔들리고 부족한 노출로 인해 자연스러운 잔상을 남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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