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타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

경험과 해석의 간극

by 파르크

심리에세이를 읽다가 공감이 어려운 지점을 만났다.


60년대생인 작가는 ‘남성의 잠재적 폭력성에 대한 공포’가 그녀가 살아온 시대의 여성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감정이었다고 적었다. 창밖에서 훔쳐보는 일, 가부장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 흉기로 위협해 금품을 빼앗기는 경험까지—여성은 쉽게 폭력에 노출되었고, ‘남성이 두렵지 않았다면 삶이 더 풍성했을 것’이라는 말에 주변 여성들 역시 깊이 공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심리적 거리감을 느꼈다.

나도 중학생 때 교복을 입고 탄 만원 버스에서 의도적인 신체 접촉을 당해봤고, 가방을 칼로 찢어 소매치기를 시도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친구의 아버지가 식탁을 뒤엎고 폭언을 쏟아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자라온 원가족의 남성들은 그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릴 적 내 곁의 남자들—아빠와 삼촌, 외할아버지라는 좁고 작은 세계의 남자들이었지만—그들은 으레 ‘폭력성’과 동떨어진 상냥함으로 나를 대했다. 외할아버지는 『전국노래자랑』 에서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내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췄고, 산에 나를 데리고 가서 고사리를 캐며 끝없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삼촌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주면서도 더 주지 못해 아쉬워했고, 아빠는 늘 눈을 맞추며 웃음 지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말은 잘 못하는 무뚝뚝한 성미였으나, ‘딸과 같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감정을 눈이 숨기지 못했다.
나에게 남성은 사랑을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훗날 폭력성을 드러내는 남자들과 마주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문제’였지, 남성이라는 집단 전체에 대한 공포로 번지진 않았다.

같은 ‘남성’이라는 대상을 두고 완전히 다른 정서가 떠오르는 이유는 결국 서로가 지나온 시대와 환경, 그리고 그 경험을 해석해 온 방식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이 생각이 스치던 순간, 문득 앨버트 엘리스의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의 생각은 올바르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했다. 사실 삶을 행복하게 유지할 만큼 제정신이지만, 또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일관성이 없게 행동할 만큼 제정신이 아닐 때도 있다.



인간의 인식은 늘 흔들리는 기반 위에 놓여 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해석은 매번 다르고, 사람마다 ‘당연함’의 기준과 ‘바름’의 감각이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타당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시대를 살고 비슷한 경험에 노출되었는데도 반응이 닮았다가도 낯설어지는 이유, 예측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이유도 모두 이런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 들쭉날쭉한 해석의 습관들, 그 불균질 한 축적이 결국 ‘개인의 결’을 만든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상대가 쌓아온 해석의 역사와 그 미세한 흔들림들까지 온전히 알 수 없기에 결국 오답을 내놓곤 한다.

타인은, 끝내 타인일 수밖에 없다.

마음이 아무리 가까워져도, 같은 사건을 함께 겪어도,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할 수 없다. 해석의 격차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관계는 쉽게 틀어지고 비난이 생기지만, 반대로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면 오히려 관계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너는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서로를 억지로 맞추려는 욕망에서 비로소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너를 이해해.”
라는 말보다,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이유가 있겠지.”
라는 태도가 우리가 타인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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