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된내기골 메밀밭 , 한강
주말에 급히 생긴 자리 때움으로 생애 두 번째의 메밀밭 구경을 따라갔다.
이 작은 나라의 땅덩어리엔 무슨 보약을 숨겼길래 이리 철마다 각양각색의 꽃무리를 지천에 피워
사람들을 불러내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어떤 계절이 좋았니?"
밥을 먹다 누군가 이 진부한 물음을 새삼 스러이 화두로 올린다.
살아가면서도 수없이 바뀌던 그 감정, 취향들을 누구에게 정하란 말인가?
한 계절 날리던 꽃잎을, 낙엽을 그리고 쏟아지는 장마비를 보았던 그 시간들이 모여 한 순간 인생이 되어
있었다. 부모였고 오랜 직업에도 전념한 교사였지만 그 이전에 나 자신인 것도 잊지 못했다.
그래서 행복했고 또 불행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제 남은 시간 무엇을 하게 될까 묻는 시점이다.
오늘만 사는 것 같이 바쁘던 젊은 날에는 틈이 나면 나라 밖 여행으로 보상하려 했고 그때는 낯선 문화에
대한 경이로움도 컸다. 이국적인 유적이나 천재들의 창작물을 접하던 감동이 값지고 은밀한 자산이 되었지만
코로나를 겪으며 밟게 된 내 나라의 계절감엔 필수 영양소 같은 맛이 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철 따라 그리 꽃놀이를 챙겼던 것인가
나는 못 가본 지구촌 여행길을 또 걷게 되겠지만 때 되면 우리 산자락을 물들일 꽃무리나 숨은 섬들이
내는 밥상에도 자주 마음을 줄 참이다.
평창 메밀에만 익숙한 우리에게 매우 정겨운 우리말 지명을 가진 충청도의 '된내기골'은
청주시 추정리에 위치한 신생 메밀밭이다. 근래 예능이나 드라마의 배경이 되면서 핫플이 되었다는데
원래 메밀을 얻기 위한 밭이 아니라 꿀벌의 먹이가 될 밀원을 얻으려는 양봉 사유지로 봄에는 유채꽃을, 가을이면
메밀로 온 산을 뒤덮으려 노력했단다.
이런 벌꿀 장인의 긴 노고가 더불어 충청도에 좋은 관광명소를 하나 만들었으니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일이 될 듯...
버스 주차장에 내려 15분 정도를 걸어 산 입구까지 가는데 길목에서부터 가을가을하여 모두들 눈 둘 곳이
바빴다. 한창인 코스모스 무리나 탐스럽게 영근 사과나무 울타리를 한 집들이며 곳곳에 꿀벌들이 잉잉대는 게
시골 사는 맛이 눈으로 느껴지는 동네다.
경사진 길을 걸어 오르느라 좀 힘들었지만 그다음 시야에 전개된 풍경은 눈부심 그 자체였다.
평지인 평창과 달리 산허리를 휘감으며 끝없이 채워진 메밀밭은 아래서 바라보는 시선이나 산위에서 보는 전망 모두 탄성이 나온다. 밭 사이로 젊은 데이트족과 웨딩촬영 온 부부들이 많아 요즘 핫한 여행지 맞네 싶다.
"10월엔 흰 눈 같은 꽃더미가 이 땅을 한 순번 하는 거구나"
감동하며 양봉상자 위에 잠시 걸터 쉬었더니 분주한 사진작가들의 컷 속에 더불어 잡히고 있다.
꿀벌의 거주지답게 1개 5천 원씩이나 하는 벌꿀 젤라토 아이스크림이 곁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청주시내로 들어와 가성비 좋은 식당을 갔는데 요즘 물가에 수도권에서는 먹을 수 없을 신선하고 풍성한
음식들이 차려져 좀 놀랐다. 직접 가꾼 농작물을 아낌없이 쓰시는 듯...
옛맛이 살아있는 호박죽을 감탄하며 먹었다.
이 가을에 여린 소녀 같던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단다.
책장에서 잊고 있던 그녀의 시집을 찾아 다시 머리맡에 놓았다. 10여 년 전 나의 밑줄들은
너무 차고 강렬한 부분들이어서 어리둥절하기 조차 하다. 아! 맞다. 나 이제 할머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