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세 딩크족에게 아기가 굴러 떨어지다.
나이가 많은 산모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일까? 바로 느긋함이다. 40년 사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어서 웬만한 일은 타협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다. 강력한 갑옷처럼 단단해진 마음은 나이 든 사람의 가자 큰 무기이다. 나이가 들 수록 좋은 점이자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40대의 여유로움은 아이의 주도성과 독립심을 키워주고 인지능력을 발달시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무던하게 키운 아이가 오히려 학습성과가 높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그러나 그런 40대도 어쩔 수 없이 무너지는 사건, 안달하고 초조해지고 마는 일이 바로 임신이 아닐까 싶다.
임신이 어떤 건지
알고는 못한다.
임신은 가늠하는 것과 실제의 느낌이 매우 다르다. 임신이 된 순간부터 여자의 몸은 아이를 만드는데 주력하는데 그 과정에서 여자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다양한 고통을 겪게 된다. 그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어느 것도 결코 만만치 않다.
입덧, 두통, 환도 선다, 임신소양증, 배 쑤심, 갈비뼈 통증 등의 신체적 고통은 감수한다 치더라도 그저 임신했으므로 생기는 증상들, 가령 얼굴과 몸에는 생전 없던 기미가 올라오고 겨드랑이는 시커메진다. 배에는 굵은 임신선이 생기고 부숭부숭 털이 난다.
가슴이 커져서 쳐지다 보니 가슴 밑바닥이 몸통에 닿는 기분이 드는데 불쾌하기 짝이 없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 한 마리의 젖소가 된 것 같아 우울해진다. 그뿐 아니라 몸이 붓고 얼굴이 퉁실해지며 허리선이 사라져 통짜 몸매가 된다.
입덧은 최악이다. 삶의 질을 뚝 떨어뜨리니까. 먹는 것이 인생에 이렇게 중요한지 임신 전의 나는 단 10%쯤 느끼고 살았나 보다. 먹으면 토할 것 같고 먹지 않으면 울렁인다. 뭔 맛인지 모르고 배를 채우는데 소화도 잘 되지 않아서 불편하다.
나는 입덧, 침덧, 체덧이 차례로 왔는데 그중 가장 괴로운 것이 침덧이었다. 입에서 계속 쓴맛이 나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단 것을 입에 달고 사는데 그마저도 곤욕이다. 당뇨 가족력이 있기 때문에 임신성 당뇨를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나는 기분 좋은 임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를 함께 나눠볼까 한다.
진부하지만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비단 임신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은 천금을 줘도 다시 오지 않는다. 진실의 순간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지금 이 순간에는 허구일 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스토리가 되었고 미래는 상상 속 소설일 뿐이다.
허구의 세상에 빠지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본다. 누워있는 느낌, 침대보와 피부가 닿는 포근하면서도 까끌거리는 기분, 키보드를 탁탁 치는 경쾌한 소리와 타격감, 향긋한 유기농 루이보스티의 향기를 충만하게 느끼는 것이다.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디디자. 현실의 충만함은 감사를 이끌어낸다.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과거 후회의 예시: '아이를 더 빨리 낳을걸.', '아이를 낳지 말걸.'
미래 걱정이 예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경력 단절이 되는 걸까?',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일상에서 하던 일들을 조금씩 덜어낸다. 이전에는 뭔가 잘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어 잘 쉬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임산부이기 괜찮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있어도 나를 포함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일찍 일어났다면 1시간 더 자고, 8시간 일했다면 두 시간 덜어 내서 6시간만 한다는 생각으로 한다. 집안 일도 한 움큼 덜어낸다. 조금 지저분하면 뭐 어떤가? 임산부는 쪼그려 앉지도 못하는데 어쩔 수 없잖은가?
일과 집안일보다 아기를 품고 있는 임산부의 상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에 태클 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 아기 핑계를 대면서 덜어내자. 임산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임산부들은 설렘과 두려움 어딘가에 머무른다. 곧 아기가 태어난다는 데에 있어 기대도 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행복한 지옥 vs 지루한 천국
지옥(?)에 떨어진 산모들의 50%가 산후 우울증을 겪는다. 우울증을 겪어본 사람은 그게 무엇인지 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데 아무런 희망도 생기지 않는 상태, 죽음과 삶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새로운 아침이 버겁고 괴로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우울증이라는 병이기 때문이다.
예방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 더욱 명료히 해야 한다. 여자는 엄마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다.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정도까지여야 한다. 절대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의 임산부 버킷리스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버킷리스트를 적다 보면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다. 적어놓고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면 원하지만 want 좋아하는 것 like 은 아닐 수 있다.
이런 건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should, 혹은 쉬는 동안 이건 해야 해! Must는 과감히 삭제하는 것이 좋다! 내 맘대로 쓰는 버킷리스트니까!
임신한 아내에게 먹을 것을 사다 주고 쓰레기를 버려주고 염려해 주는 것으로 남편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편들이 많다. (그마저도 안 하는 남편이 있다면 경찰에 신고하자.)
아내는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남편은?
대부분의 시간을 기존의 일상과 비슷하게 보내고 본인이 좋아하는 활동을 마치면 그제야 남는 시간을 쪼개 임신, 출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예비 아빠 점수 몇 점?
남편들이여! 스스로 예비 아빠로서의 몇 점인지 생각해야 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이 준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책임감을 가진 성인이 정자를 뿌렸다면 '마인드 세팅'은 기본 중 기본이다.
그 이후가 진짜 실력이다.
송수연의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