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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호박전

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여름이다. 한 여름. 우리 집은 딱히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래도 어디선가 계속 과일이며 채소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텃밭이 있었고 할아버지는 담벼락 아래 자투리땅에도 무엇인가를 심어 두셨다.      


담벼락 출신 채소 중 대표 선수가 호박이었다. 동글동글한 녹색의 호박. 한 여름에는 호박전, 호박볶음을 자주 먹었다. 이렇게 해도 남는 호박은 말려서 호박고지를 만들어 두셨다. 겨울이 되면 돼지고기 고추장 볶음에 들어가 있는 호박고지를 찾아 먹는 재미가 있었다.      


한 여름 호박전 조리 담당이 나였다. 식용유를 적당히 두른 프라이팬에 납작하게 썬 동그란 호박을 지져내는 일이다. 공모양의 호박을 납작하게 썰게 되면 지름이 제각각인 납작호박이 된다. 원형의 프라이팬 안에 빈틈없이 호박을 채워넣어야 한다. 한번에 대량 생산해야하고 불과 기름도 아껴야 한다! 큰 동그라미 안에 크기가 다른 동그라미를 배치하는 기하학적 고려가 필요한 매우 지적인 작업이다. 힘으로 우겨넣었다간 호박이 쩍하고 부러지므로 과욕은 금물이다.

      

배치의 미학을 발휘하는 동시에 호박이 타지 않도록 프라이팬 중심부에 있던 호박의 낯빛이 투명해지면서 가운데가 부풀어 오르게 되면 프라이팬 바닥의 열이 상대적으로 낮은 외곽 쪽으로 자리를 바꿔 줘야한다. 그래야 한판에 굽고 있는 호박을 한꺼번에 부쳐내고 새로 한판을 시작할 수 있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10-15개 정도의 호박의 색깔 및 모양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적당한 시기에 뒤집기와 배치를 실행해야하는 고난도의 과업이었다.      


호박이 다 익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스댕’ 숟가락의 술입으로 호박의 테두리를 살짝 눌러서 살캉하게 쑤욱 들어가면 익은 것이고 힘을 줘야 하며 아직 덜 읽은 것이다. 호박은 안쪽이 먼저 익고 바깥 쪽이 나중에 익는다. 호박은 익을 때 안쪽은 색이 변하지만 테두리 쪽은 색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색만 봐서는 익기 정도를 알수 없다. 반드시 눌러봐야 한다.      


호박전은 밥반찬이다. 간장과 식초 그리고 약간의 고춧가루를 섞은 양념장에 찍어 먹었다. 달달하고 부드럽고 짭쪼롬하고 고소했다.      


성인이 되어 식당에서 만난 호박전은 밀가루나 달갈물을 호박에 입혀 부쳐낸 것이었다. 호박의 지름도 내가 부쳐내던 호박에 비하면 반쯤을 줄어들어 있었다. 밀가루 옷이나 달갈물을 입은 호박은 서걱했고 차가웠다. 우리 집 호박전은 입에 들어가면 바로 녹아 없어지는 흐믈흐믈한 식감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옷을 입히지 않는 ‘누드 호박전’에서는 채수가 나온다. 밥을 다 먹을 때 쯤이면 호박전을 담은 접시에는 기름기 있는 노란 체수가 남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 집 호박전은 그때 그때 바로 만들어 먹는 반찬이었지 두고 먹을 수는 없었다. 더운 여름날 어스름 저녁 무렵이면 호박전 부쳐내느라 내가 일이 참 많았다. 

     

동글동글한 모양의 우리 집 호박을 조선호박이다. 요즘은 ‘풋호박’, ‘둥근호박’이라고도 불리며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데 애호박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눈에 보일 때면 얼른 집으로 모셔온다. 지금도 호박전 맛은 그 때 그맛이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그냥 호박을 납작하게 썰어 기름에 지져내어 초간장에 찍어 먹으면 달달하고 부드럽고 짭쪼롬하고 고소한 호박이 내 입안에서 녹는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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