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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를 넣은 라면

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라면에 칼국수를 넣겠다고 칼국수 건면 한 봉지를 사둔지가 반 년은 넘었을 것이다. 이제야 끓일 생각을 했다. 라면 한 봉지도 다 못 먹는 위장의 소유자인 주제에 칼국수까지 넣기를 주저했었다. 오늘은 먹다가 남기더라도 꼭 끓여보고 싶어 칼국수 한줌과 스낵라면 한 봉지를 뜯었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칼국수를 넣은 라면을 먹고 싶었다.      


내가 만든 칼국수를 넣은 라면은 내가 원하던 모양도 맛도 아니었다. 실패!. 물은 500ml가 아니라 세 배는 잡았어야 했다. 바싹 마른 칼국수가 물을 자꾸 먹어버리는 바람에 먹기도 전에 라면죽 같이 되어 버렸다. 끓여보니 알겠다. 할머니는 라면에 칼국수를 넣은 것이 아니라 김치칼국수에 고명처럼 라면과 스프를 넣어 맛올리기를 하신 게 분명하다. 내가 끓인 칼국수를 넣은 라면은 칼칼한 국물 맛도 없었고, 감질나게 걸렸던 라면 면발을 먹으려고 아쉬워했던 기억과는 달리 라면에 칼국수 면발을 낚시질 하듯 찾아 먹어야 했다.     

 

할머니표 칼국수를 넣은 라면은 1인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다섯 명은 먹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냄비를 사용하셨다. 우리 집 형편에 라면으로만 재료를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니 칼국수를 메인으로 하고 라면은 사이드로 넣으신게다. 1983년 기준으로 라면은 120g 1개 가격이 100원, 국수는 900g 1봉에  355원이었다고 한다. 라면이 칼국수보다 두 배는 비쌌다. (출처 세종경제뉴스, 23.10.17 “1983년 100원하던 라면 8배 올랐다…소주는 5배 인상“ 한국물가협회, 창립 50주년 주요 물가 길잡이)     


생각해 보면 라면에 들어가 있던 건면이 넓적한 칼국수였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우리 집에서 국수집까지는 정말 가까웠다. 대문을 나서서 왼쪽 또랑을 따라 신작도까지 연결된 길은 면장 할아버지 댁과 사진관 뿐이었다. 사진관 앞 신작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으면 또랑 위 다리가 바로 연결되었다. 다리를 건너 길가 왼쪽  첫 번째 가게가 국수집이었다. 가게 안은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국수를 뽑는 기계와 완성된 국수가 진열되어 있을 뿐이어서 미닫이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가게는 늘 횡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색의 기계, 누런 밀가루 포대들, 하얀 국수가 전부였으니 눈에 거슬리는 색이 없었던 것 같다. 


가게 뒤쪽으로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과 가게 옥상에서 국수를 말리는 모습은 우리 집 대문 앞 꽃밭만 지나가도 볼 수 있었다. 응당 국수 심부름은 내 차지였다. 국수는 내 옆구리에 껴도 꽉 찰 만큼 커다란 묶음으로 팔았다. 크라프트지 같은 누런 겉면에 기름을 먹인 듯 맨질맨질한 종이로 하얀 국수를 동그랗게 단단히 묶어 놓았다. 일정하게 잘린 국수를 둥그렇게 감으면 원통형이 되고 원통형의 원에는 잘린 국수의 단면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검지 끝에 힘을 주되 조심스럽게 천천히 동그란 국수 꾸러미의 단면을  꾸욱 밀면 반대쪽에서 국수가 내 손가락 굵기만큼 빠졌다. 국수심부름의 재미였다.  우리집앞 국수집에서 칼국수를 팔았었을까? 확신이 없다. 

    

어릴 적 내가 샀던 소면은 요즘으로 치면 중면 정도의 굵기였다. 요즘 파는 소면같이 얇은 국수를 먹어본 것은 집 밖에서 국수를 먹을 수 있었던 고등학생 시절이나 대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우리집 국수는 다용도였을 것이다. 비빔국수든 잔치국수든 모두 집 앞 국수집 국수로 해 먹었다. 그러니 라면에 넣었다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납작이 모양의 칼국수도 어쩌면 그냥 그 중면같은 소면이었을 텐데 내 머릿속 기억장치가 그냥 칼국수로 입력 오류를 일으켜버렸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할머니표 칼국수를 넣은 라면에서 양을 부풀리던 또 다른 재료는 배추김치였다. 나는 국수면발을 다 먹고 남은 국물에 밥도 말아 먹었다. 그때 씹히던 김치는 보들보들하게 부드러우면서도 아삭했다. 숟가락으로 밥 말은 국그릇을 뒤적거려 김치 한조각을 찾은 후 그 위에 시금한 국물로 불러난 밥을 같이 얹어 입으로 넣으면 입안에서 사각거리고, 물컹거리는 식감과 시큼하고, 고소한 맛이 뒤섞였다. 맛있었다.      


다짐이다. 이번의 실패를 교훈삼아 다음에는 넉넉하게 물을 잡고 김치도 더 넣고 아예 2인분을 끓여 보겠다. 이번에 만든 칼국수를 넣은 라면은 사진으로 찍어 보았으나 정말 볼품이 없다. 다음에 다시 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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