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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경보를 대하는 할머니의 자세

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그날은 화창했었다. 점심 때 쯤 이었고 나는 안방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위위위위윙잉이이이” 사이렌 소리가 났다. 때마침 쇼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는데, 쇼 프로그램 앞에 자막이 떴다. 무용수들이 춤추고 있는 영상을 배경으로 한  커다란 글자였다. 전쟁이 났다고 대피하라는 메시지였던 것 같다. 가슴이 콩광콩광. 순간 걱정을 했었다. “친구들과 헤어지면 어떻게 만나지?”     


할머니는 다락에 올라가 계셨는데 나는 할머니에게 “피난가래요!!!” 라고 소리치며 수선을 피웠다. 다락에서 돌아오는 할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가긴 어딜가. 여기 앉아서 죽으면 된다.”     


할머니는 전쟁 때 지프차를 얻어 타고 피난 가셨던 일, 할머니의 시아버님(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이 피난 가지 않고 집을 지키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디에 묻혀계신지 모른다, 가끔 시아버님이 꿈에 나오시는데 강변가에 묻혀계신가보다 같은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할머니 나이 25살. 벌써 두 아이의 엄마셨다. 큰 아이는 걷게 하고 작은 아이는 업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설 때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40년 전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1983년 2월 25일은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에 왜 내가 집에 있었지? 학교를 왜 안 갔지? 

봄방학이었나 보다. 나는 중1을 마치고 중2로 올라갈 참이었다. 중학교 입학할 때 두발 자율화가 있었다. 그래도 교복은 입었다. 딱 1년. 탈부착이 가능한 하얀 칼라를 손빨래했던 기억이 교복에 대한 추억의 전부다. 중2부터 교복 자율화로 교복을 입지 않았었다.      


다른 궁금증. 금요일 대낮에 왜 텔레비전이 나오지? 나 어릴 적 에는 저녁밥 먹을 때쯤이 되서야 텔레비전이 나왔다. 1983년 2월 24일자 동아일보 편성표를 보니 아침방송이 오전 10시에 끝난다. 저녁방송은 오후 5시 30분에 시작한다. (동아일보는 당시 석간) 이웅평 대위 귀순시간이 오전 11시 경이었으니 경계경보 발령은 그 이후다. 11시 넘어 점심 때 쯤 나는 분명 텔레비전에서 경계경보를 봤다. 춤추던 무희들도 확실히 기억한다. 어찌된 일인가.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온 것은 새집을 짓기 전이었다. 텔레비전 안테나가 있었는데 바람에 안테나가 돌아가면 화면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런 일은 꼭 추운 날이거나 밤에 발생했다. 누군가 나가서 안테나를 돌리면서 안방과 소통을 해야 했다. 누가 그 임무를 실행했겠는가. 당연히 나였다.  “잘 나와요?”, “조금만 더 돌려봐라~”     


새집에도 안테나가 있긴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공시청’을 했다. 추운 겨울 밤 안테나 돌리기는 더 이상 안 해도 되었다. 난시청을 해결하기 위한 중계유선방송이었던 것을 우리는 그냥 공시청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공시청덕에 정규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이 송출되지 않는 평일 낮 시간에도 텔레비전에서 쇼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2023년 5월 31일 아침 6시 30분 조금 넘었을 무렵 사이렌 소리가 났다. 핸드폰에서도 울리고 밖에서도 울렸다. 텔레비전을 바로 켰다. 뉴스 화면이 40년 전과 비슷하다. 빨간색 바탕에 아주 큰 글씨다. “··· ·백령대청도 지역 가까운 지하대피시설로····” 텔레비전을 껐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추억의 드라마 ‘전원일기’에서나 보았던 이장님의 동네 방송 같은 안내 방송이 실제로 밖에서 쩌렁쩌렁 울린다. 내용은 잘 들리지 않는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안내 방송이 가능하구나.      


40년 전 할머니의 나이만큼 나이를 먹은 나는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렸다. “가긴 어딜가. 여기 앉아서 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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