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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참 잔치국수

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1980년쯤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 집은 새 집을 지었다. 할아버지의 환갑잔치를 하고 난 후였고 할머니는 50대 중반이셨다. 창고로 사용하던 커다란 광을 부수고 그 자리에 집을 지었다. 건축양식이랄 것도 없다. 막내이모는 우리 집을 ‘불란서집’이라 불렀다고 했다. 불란서집? 프랑스식 집이란 말인가? 어디서 튀어나온 프랑스 스타일 건축양식? 

    

박공지붕이 비대칭으로 얹힌 겉으로 보기에는 2층이지만 기능적으로는 1층만 사용했던 1.5층 양옥집이었다. 위층을 왜 올리셨는지 모르겠다. 위층은 지붕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서나 어른이 허리를 펼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잡동사니만 올려졌다. 난방도 안 되어서 여름에나 가끔 부엌 위쪽의 직각 세모형 다락방을 내가 공부방으로 사용했다. 앉은뱅이 내 책상과 나란한 높이에 작은 창문이 서쪽으로 나 있었다.      


우리 집은 농촌주택개량사업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소위 ‘불란서식 미니 2층’이 우리 집 건축양식이었다. (참고 : 경향신문 박철수의 ‘거취와 기억’(5) ‘응팔’ 정환의 집처럼… 구별 짓기 경쟁이 낳은 부잣집 상징 2016.05.12 22:17 입력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시절도 시절이었고 어린이인 나는 우리 동네를 떠나 여행을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집이 그냥 우리 집이고 우리 동네에는 우리 집과 비슷한 친구 집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 지은 우리 집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었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저기 우리 집과 비슷한 집이 참 많기도 했다. 복사기로 찍어낸 듯한 불란서식 미니 2층 양옥집. 그래도 그런 집들을 보게 되면 우리 집을 보는 양 반갑기만 하다.      


◯ 새참

우리 집을 질 때 오후가 되면 할머니는 새참으로 잔치국수를 만들어 내곤 하셨다. 우리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 샘뚝(가족끼리 불렀던 샘가의 별칭)이 있었고 오른편이 안채였다. 샘뚝 건너편이자 안채의 시작이 부엌이었다. 


부엌은 넓고 깊었고 양쪽 개방형이었다. 큰 무쇠솥이 걸려있는 아궁이가 샘 쪽에 위치했다. 샘에서 부엌으로 들어가자 치면 맨 앞 왼쪽에 솥이 걸려 있는 것이니 나름 동선을 고려한 배치였다. 재래식 부엌이 그렇듯 우리 집 부엌도 깊이가 있었다. 부뚜막과 아궁이를 앉히느라 부엌 바닥을 좀 파내야 했을 것이다. 부엌의 깊이만큼 계단이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이 계단을 늘 오르락내리락하셨다.

      

샘가에는 마중물을 부어 물을 길어 올리는 작두펌프가 있었다. 은색의 수도꼭지가 달린 수전은 내가 중학교 때쯤 샘가 한편에 설치되었다. (1985년쯤 상수도 공사가 시작되었음. 부강면지 714쪽.) 수동 작두펌프로 길어 올리는 물은 지하수라고 했다. 겨울에도 뜨거운 물을 펌프에 들이 붓기를 몇 차례하고 나면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었다.     


할머니가 새참으로 잔치국수를 만드실 때는 분명 무쇠 솥에 국수를 삶으셨을 것이다. 집 짓는 일꾼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그 많은 양의 국수를 만들기 위해 물을 길어 나르고, 불을 지피고, 삶은 국수를 헹구려고 샘가까지 들고 나르고 하셨을 것이다. 동선을 줄이기 위함이셨을까 내 기억에 국수 양념은 부엌에서 하지 않으셨다. 미리 준비된 양념과 고명을 샘가로 들고 와서 그 자리에서 무치고 그릇에 담아 일꾼들에게 내가셨다.      


잔치국수를 먹을 일이 생기면 할머니의 새참 잔치국수가 생각나곤 했었다. 할머니 잔치국수의 맛은 그렇게나 오랫동안 기억했으면서도 왜 그동안 한 번도 어떻게 할머니가 그 잔치국수를 만들어 내셨는지 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텐데. 앞으로  글쓰기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이런 낭패감을 만나게 되려나.      


◯ 호박볶음 잔치국수      

할머니의 잔치국수는 소면이었다. 내 심부름 중 하나가 국수 사 오기였는데, 그냥 국수와 마른 칼국수였다. 그냥 국수가 소면이었다. (중의 존재는 마흔이 넘어서 알았다.)     


할머니는 삶은 소면에 간장양념을 뿌려 비빔국수 만들 듯 살살 비벼가며 양념이 골고루 면에 배게 만드셨다. 간장양념은 집간장(조선간장), 다진 파, 다진 마늘, 설탕, 고춧가루, 참기름.      

간장양념에 비벼진 국수를 냉면기 같은 넓은 스댕 대접에 담고 미리 만들어 놓은 멸치장국을 자작하게 부었다. 그리고 국수 위에는 채쳐 볶은 호박이 고명으로 넉넉하게 올라졌다.     


여기서 멸치장국의 양은 흥건하면 안 된다. 국수를 다 먹고 나서 남은 장국을 두 모금 정도 쭈욱 들이킬 만큼이어야 한다.      

고명으로 얹는 호박 볶음은 둥근 호박을 곱게 채쳐서 소금으로 절여 물기를 꼭 짠 후 양념을 해서 볶아놓은 것이다. 그냥 밥반찬으로 먹어도 되었는데, 이걸 할머니는 국수에 고명으로 얹으셨다.      


지금의 잔치국수와 간장비빔국수의 중간 형태를 나는 할머니의 잔치국수로 알고 자랐고 그게 입맛이 되었다. 식당에 가면 가끔 모자라는 간을 하라고 간장양념이 나올 때가 있다. 이미 간이 맞아도 나는 괜스레 한 숟가락 양념장을 넣는다. 


할머니의 잔치국수도 역시나 재현이 어렵다. 나에게는 할머니의 조선간장이 없다. 생마늘도 안 먹는다. 생파도 먹기 힘들다. 이렇게 포 떼고  차 뗀  간장양념부터가 할머니의 잔치국수를 만들기에는 함량 미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 오는 토요일 저녁,  집에 중면이 좀 있다. 세일한다고 애호박도 한 개 사 둔 것이 있다. 어설프게나마 잔치국수 만들어 볼까.      


◯ 막내이모의 기억     

막내이모와 나는 열 살 차이다. 할머니의 잔치국수 레시피를 확인하다가 막내이모의 새참 잔치국수 생산 참여기를 듣게 되었다. 막내이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을 지었다고 했다. 얼추 내 기억과 맞다. 막내이모가 불을 때서 국수를 끓였는데, 국수 끓이는 장소가 부엌이 아니고 대문과 안채 사이 공간, 장독대가 놓인 안쪽에 양은솥을 걸어 놓고 국수를 끓였다고 한다. 기억 오류. 나의 국수 심부름처럼 이모는 막걸리를 받아왔다고 한다. 할머니는 나에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신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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