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떠남이 두렵지 않은 여행자가 보내는 첫 번째 러브레터
@인천공항, 대한민국 인천
2018년 6월 15일. 4년 1개월간의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인생 첫 유럽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심지어 혼자요. 그간 3박 4일 정도의 짧은 여행은 몇 차례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언제나 친구와 함께였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이들과의 여행은 저에게 '쉼'이었지요.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는 일종의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이번만큼은 도망치기 위해 여행을 택했습니다.
요즘 미디어들은 저처럼 혹독한 번아웃을 앓고 있는 직장인을 가르켜 '직춘기(직장인 + 사춘기)를 겪고 있다'고 표현하더군요. 잡코리아에 따르면 직장인 744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67.6%에 달하는 직장인들이 '현재 직춘기를 겪고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미 극복했다고 답한 23.8%까지 합하면, 90%가량의 직장인들이 직춘기를 경험한 셈이 되겠죠. 저는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그리고 이 넓은 서울 빌딩 숲에서 혼자만 이리도 괴로운가 고민했는데, 다들 마음 한쪽에 무거운 짐을 숨기고 계셨나 봅니다.
처음에는 책 속, 다음에는 친구들 속, 침대 속, 내 방 속으로 차례로 도망을 갔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힘내'라는 따뜻한 글귀와 친구들의 위로는 저에게 큰 위안이 됐지요. 그러나 그건 잠시일 뿐,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앉을 때마다 똑같은 감정과 고민이 저를 잠식해오는 겁니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왜 힘든지 모르겠는 거죠. 일도, 직장 동료도, 그 무엇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 데 스스로 더욱 지쳐갔습니다. 바보 같죠. 나이 서른에 내가 왜 힘든지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는 게.
제 취미는 대중교통을 타고 가다가 아무 정류장에나 내려 생전 처음 보는 곳을 걷는 겁니다.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과 건물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됩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2년쯤 됐을 때, 외부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길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때 우연히 알게된 일상의 묘미랍니다.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혼자 서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자유를 주거든요. 비트 빵빵 터지는 걸 그룹 음악을 들으며 그들의 안무를 흉내 내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말 하고 싶었지만, 목젖 뒤로 꾹 삼켰던 말들을 내뱉기도 합니다. '흥, 너나 잘하세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멀리 떠나보면, 철저히 혼자가 되어보면 지금 내가 어떤 감정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기차를 타고도 갈 수 없는 저 먼 곳에서 어설픈 쉼표가 아닌 제대로 된 마침표를 찍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요. 이게 바로 제가 퇴사 후 첫 일정으로 인생 첫 유럽 여행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재밌는 건 여행 가서 알게 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나는 한국을 굉장히 좋아한다.'라는 겁니다. 여행 내내 '한국은 이렇지 않은데'라는 말을 달고 살았거든요. 사실 내가 머문 이 자리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떠나야만 알 수 있는 가장 큰 결실이겠죠. 그다음으로는 제가 죽어도 인정하기 싫었던 제 단점들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십여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면서요. 이 에피소드는 이후 글에서 공개할 예정이라 지금은 살짝 지나가 보겠습니다.
또 제가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도 찾았습니다. 저 스스로 회사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어차피 떠나지 못할 거란 걸 알기에,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나 봅니다. 회사 생활 3년 차를 넘기며 차올랐던 업무에 대한 자신감이 4년 차를 넘기며 부끄러움으로 몰려왔어요. 그간 해왔던 일이 아닌 새로운 일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스스로 참 많이 미워했습니다.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이, 월급이, 사람들의 시선이, 책임감이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게 당시의 절 지치게 했습니다.
비로소 떠나야 알게 된 것들을 통해 오늘의 제가 완성됐습니다. 십여 일 간의 짧은 여행, 그리고 휴식이라 쓰고 무직이라 읽는 지난 6개월간 저는 꽤 많이 바뀌었죠. 대단히 성장하거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닙니다. 적어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게 된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때처럼 무작정 떠나고 싶진 않으니 나름 성공적인 여행이 아니었을까요.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져 브런치에 가입했습니다. 저 빌딩 숲 개미 한 마리가 여행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알리고 싶어졌어요. 비루한 글이나마 저와 같은 고민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제 문장이 지친 당신의 하루에 위안이 되기를 바라며,
이제는 더 이상 떠남이 두렵지 않은 여행자 김수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