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지진의 해와 코로나의 해
올해 4월을 넘어서며 일본에 거주한 지 10년이 넘었다. 일반적으로 10년 거주 이력 안에 5년의 직무경력이 있고 납세 등 사회 의무이행에 결격이 없었다면 영주권 신청을 해볼 만하다. 평화롭게 10년 체류를 잘 해온 나는 요즘 영주권 서류 준비에 한창이다. 이제까지 재류자격(비자)을 3번 정도 갱신했는데, 구비서류가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신상에 관한 서류부터 시작해서, 경제력에 대한 서류, 납세 수행 상태 등등... 그래도 수월하게 자료수집이 가능할 것이라 여겼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 사태 때문에 콜센터 등이 원활하지 않는 터라 입수가 어려워지는 자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졸업증명서를 신청하러 일본에서 다녔던 학교에 찾아갔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유학생 신분이었는데, 이제는 어느덧 졸업한 지 8년이 넘었다. 졸업증명서를 신청하는 서류에 입학 연도를 기입하는 란이 있다. 헤이세이 22년(2010년)이라고 적었다. 그걸 보시고 접수처 선생님께서 "동일본 대지진 때 다녔던 학생이구나!" 하신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2010년에 부푼 꿈을 안고 일본 유학을 왔는데, 그다음 해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금도 그때가 잊을 수가 없다. 한국 유학생들은 지진에 대해 잘 모른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면 지진을 경험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요즘엔 한국 남부지방에도 지진이 나곤하니, 지진을 인식하는 한국사람들이 조금 더 늘었겠지만, 그래도 큰 지진을 경험한 한국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그래서 지진이 난 날 지진이 난 지도 몰랐다. 신주쿠의 고층빌딩이 늘어선 지역으로 외출하던 중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는데, 갑자기 빌딩들이 흐믈텅 흐믈텅 출렁였다. 그래도 지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주위가 소란스럽고, 역 근처 건물에 붙은 큰 스크린에 속보라며 동북부 지방의 쓰나미 장면이 비칠 때 비로소 알았다. 도쿄에 쓰나미가 몰려온 것도 아닌데, 그 스크린을 보고 절망을 느낀 사람이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몸을 웅크리고 움직이질 못했다.
그 후 생활이 변했다. 여진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기 때문에 불안해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사는 곳을 이동했다. 당시 기숙사 4층에 기거했는데, 근처 지인댁(1층)으로 피신하였다. 슈퍼마켓 아르바이트였는데 사재기를 몸소 느꼈다. 갑자기 원자력발전소가 이상하다는 뉴스가 터졌다. 전력부족으로 어딜 가나 절전이라는 문구를 써붙이고서는 냉방량을 줄였다. 지역별로 전기공급을 순번제로 하여 공급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대지진의 여파로 학생들을 잃어버렸다. 우리 학과도 유학생의 절반이 귀국해버려서 클래스가 반토막이 났다. 그래도 딱 이 정도였다. 사람들의 불평불만은 크게 없었다. 지진의 여파를 때려 맞은 동부북 지방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상황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넘어 바다 건너 일본 소식을 전해 듣는 고국에서는 매일매일 내 안부를 물었다. 괜찮냐, 살만하냐. 약간의 혼란과 불편함은 있었지만, 곤란함은 전혀 없었다.
일본은 방재에 강하다. 워낙 천재지변이 많은 나라이고,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재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재난과 함께 살아간다. 동일본 대지진이 워낙 대규모였기 때문에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크고 작은 지진에 하나하나 놀라지 않으며, 안전사고가 비교적 적다. (한국에서 왜 세월호 같은 사태나 스크린도어 사고가 일어나는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재난에 대한 시설 구비와 교육이 잘되어있다. 회사에서는 헬멧과 필수 방재 구가 인원수대로 지급되고 정기적으로 대피훈련을 반드시 한다. 이런 점을 겪어오면서 나는 일본 사람들은 위기에 단련되어있으며, 위급상황에도 시민들은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코로나가 한창 한국에서 맹위를 떨치려는 때에 한국에 잠시 귀국하게 되었다. 직장 상사들은 내가 한국에 가지 않았으면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직계가족의 경조사라 잡으래야 잡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나한테 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자꾸 나를 불러다 무언가를 물어댔다. 식장은 어디냐, 하객이 몇명오냐...내용을 달리해서도 부르고, 부르는 사람을 달리해서도 부르고. 그래도 끝끝내 가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하더랬다. 어쨌든, 한국에 다녀왔고 2주간의 자가격리가 끝나니, 직장에 돌아갔는데 쑥대밭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 직장에서 감염자와 밀접접촉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 후로부터 일본에서도 상황이 악화되어 4월 4주째 되는 현재는 집에만 박혀있게 되었다.
특히 집 주변 서비스업 자영업자가 임시휴업을 많이 했다. 비교적 음식점은 그렇게 닫은 곳이 얼마 없어서 별 영향을 못 느꼈는데, 오늘 신주쿠에 갔더니 얼마나 사태가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신주쿠에 아침 9시에 갔는데, 문을 연 커피집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카페인을 조달하지 못하여 너무나 힘들었는데,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굉장히 많은 오피스가 밀집한 신주쿠인데, 이럴 수가 있다니.
학교에 갔다. 코로나 사태로 학생 구경을 못하신 접수처 선생님께서 내가 오자 너무 반가워하셨다. 이렇게 학생과 이야기를 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좋아하신다. 이야기를 나누어가니 요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번에 새로 들어올 입학생은 입국조차 하지 못하고, 유학비자가 효력 정지되었다. 그래도 입학생은 아직 시작도 안 해서 그나마 나은데 더 문제인 건 재학 중인 예비 2학년 학생들이란다. 2년제 전문학교는 수업일수를 채워야 졸업을 시킬 수 있는데 남은 1여 년의 기간에 그게 가능할지 가늠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때엔 모두가 자숙해야 하는데... 하고 말을 흐리시는 선생님께 위안을 급하게 던졌다.
도쿄도지사가 매스컴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피터 져라 외쳐대는 걸 비웃기라도 하듯, 어느 주말 해변가엔 서핑족이 넘쳐났다. 긴급사태 선언까지 발표해가며 일부 업종에 휴업 권고를 내린 것을 가볍게 무시하고, 사행성 오락실이 문을 연다. 더 가관인 것은, 해당 업소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업소명을 공개했는데, 현재 영업 중인 업소를 대놓고 홍보한 역할을 동시에 함으로써, 결과적으론 사람들이 그 시설에 더 몰렸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방재에는 강할지 몰라도 방역은 아닌 건가? 비슷해 보이지만 이 차이는 무엇인가. 물론 이것은 소수의 몰상식한 행위이겠지만, 대지진 때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행태를 왜 이번엔 보게 되는 걸까.
어리숙하나마 이번 사태로 인해서, 개인과 사회, 의무와 권리, 자유와 공리 등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 있는데, 이런 점이 일본 개인주의의 단상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다. 일본은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다. 일본에서 공익은 개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선을 최대한 찾아 헤맨다. 방재는 개인의 자유가 그다지 제한받지 않을 정도로 발달했는데, 방역은 아직 그 수준이 안돼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 아닐지.
공익에 개인을 희생시켜야 할 때 일본 사회는 회의적이다. 위에서 서술한 사행성 오락실에 대한 보도를 띄우며 와이드쇼에서 각 패널에게 대안점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 사행성 오락실에 영업중지를 어떻게 관철시킬까 보다는, 관철시켰을 때 과연 개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을지 어떨지를 걱정한다. 참 흥미로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 개인이 좀 더 깨어있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맡은 바에 착실하며 순한 일본 사람들에게 딱히 불만은 없는데 단 하나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사회에 대한 흥미도다. 특히 정치에 대한 관심이 낮아서 놀랍다. 지금 일본 코로나 사태의 형국이 한국에서 펼쳐졌더라면, 들고일어나도 한참 들고일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눈살은 찌푸리지만서도 바꾸고자 하는 의식은 없어 보인다.
요즘 읽고 있던 책에서 이런 구절이 나왔다. "일본 사회에서 개인주의적인 사고는 사회적 가치를 우선시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미성숙함의 증거로 여겨진다.*" 몇개월 전에 이 문구를 접했다면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았을텐데...정말 경이로운 타이밍이다.
*인용출처:[세계를 읽다 핀란드] 지은이:데보라 스왈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