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정 (The Age of Shadows, 2016)
김지운 감독은 항상 다양한 모습으로 관객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영리한 감독이다. 공포(<장화홍련>), 누아르(<달콤한 인생>), 서부극(<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잔혹 코미디(<조용한 가족>), 스포츠(<반칙왕>) 등 매번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완성도 높은 영화들은 대중과 평론가 모두를 만족시켰다. 이번에는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스파이 영화 <밀정>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페이소스 2명과 함께. 언제나 빛나는 배우 송강호와는 4번째 만남이었고, 카메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이병헌도 등장한다. 추석 연휴 시즌에 탄력을 받아 1위를 유지하며 750만 관객을 돌파했다.
1920년 경성은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변절자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려는 의인이 뒤엉켜 숨 쉬는 공간이다. 조선인 일본 고등경찰 이정출(송강호)은 의열단에 잠입해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의 뒤를 밟으란 특명을 받는다. 언제나 신출귀몰한 정채산을 쫓기 위해 우선 의열단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해 친구가 된다. 이미 이정출의 정체를 알고 있던 김우진은 결국 상해에서 그에게 도리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태달라며 부탁한다. 고민 끝에 결국 이중간첩 역할을 하게 된 이정출은 폭탄을 경성으로 반입하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싣지만, 또 다른 일본 경찰 하시모토(엄태구)는 집요하게 이들을 쫓는다. 서로 속고 속이며,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군과 의열단은 치밀한 머리싸움을 계속한다.
내일이 없는 삶,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더욱 풍류와 멋을 즐겼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제 강점기의 우울하고 비극적인 삶은 일차원적인 착각이었다. 조상경 디자이너는 실제 시대를 반영한 고증과 캐릭터의 개성을 동시에 고려해 의상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귀공자 느낌의 공유, 새빨간 드레스로 고급스러움을 뽐낸 한지민이 특히 돋보이더라. 다양한 캐릭터들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빈티지로 갖춰 입으니 영화 전체의 톤도 차분하고 멋스러운 느낌이었다. '차가운 스파이물'이 목표였다는 김지운 감독의 목표를 위한 첫 번째 단추는 의상과 배경이었고, 이런 노력은 분명 성공적이었다. 특히 의열단장 정채산도 이런 배경의 힘 덕분에 적과 동지가 뒤엉킨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심지를 선보였다. 대부분 어둠 속에서 조심스레 움직이고, 항상 정체를 감춘 그의 주변은 미스터리와 카리스마과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총격 장면에서도 특등석과 일반석이 대비되는 기차를 매우 매력적으로 그려내 몰입을 도왔습니다.
사실 영화 전체를 놓고 봐도 제일 인상적이고 강렬했던 순간은 김장옥(박희순)의 도주 시퀀스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일본군 사이로 재빠르게 도망가며, 지붕을 넘나드는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은 그 어떤 5분보다 쫄깃하더라. 이를 제외하면 기차에서 밀정을 가려내기 위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각기 다른 정보를 흘려, 의열단에서 정보를 팔아먹던 배신자를 찾아내는 과정의 서스펜스는 흥미로웠다. 게다가 도망칠 곳이라곤 없는 제한된 공간인 기차라서 그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부산행>에서 좀비와 싸웠던 공유, <설국열차>에서 상류층과 싸웠던 송강호가 있어서인지 기차가 그리 어색하지 않더라. 하지만 너무나 쉽게 밀정이 밝혀지고 손쉽게 처리되는 과정에선 맥이 툭 끊기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목숨을 걸고 함께 호형호제한 의열단원보다 하루아침에 티끌 하나 없이 모든 걸 믿고 맡기는 이정출-김우진의 관계도 개연성이 조금은 모호했다. 아무리 마음에 빚이 있다곤 하지만 술자리 한 번에 기득권인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올 만큼 이정출이 애국적인 인간인가 하는 의문도 들더라.
하지만 이런 개연성의 빈약함을 메우는 건 역시 배우 송강호의 힘이다. 차분한 분위기로 영화가 너무 길게 흘러가서 지루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런 관객도 송강호의 연기력에는 의문을 갖지 않을 것이다. 영화 초반 어차피 엎어진 배라며 일본에 충성하던 친일파가 서서히 고민하고 흔들리다가 결국 '독립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로 하는 과정은 흥미롭고 놀랍더라. 대사 전달력은 말할 것도 없고, 틈틈이 위트 있는 대사를 섞어가며 영화 전체를 이끌어갔다. 카메오로 등장한 이병헌과 박희순 역시 분량 그 이상의 강렬한 연기를 선보이니 상대적으로 주인공 공유가 미미해 보일 정도였다. 처음 한국말을 내뱉자 극장이 웅성거릴 정도롤 선이 굵은 연기를 선보인 엄태구도 인상적이다. 예쁘장하고 부드러운 배우들이 득실한 최근 트렌드와 다르게 강렬한 광대뼈를 자랑하며 남성적인 면모를 한껏 발휘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뺨을 후려갈기는 모습은 연기인 줄 알면서도 섬뜩할 정도였다.
<밀정>은 황옥 경부 폭탄 사건, 김상옥 열사 등 실제 일제강점기 사건들을 따왔다. <암살>, <덕혜옹주> 등 비슷한 시기 연이어 개봉한 근현대사 영화들이 나쁘지 않은 흥행을 기록했다. 근현대사의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이 반갑기도 하며, 이때만큼 매력적인 소재들이 많은 시절이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독립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나라. 과연 개인이 사회 전체의 태풍을 바꿀 수 있을지 당연히 고민이 되고 두려웠을 시기다. 실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다가도 무기력함에 사로잡혀 밀정 노릇을 하거나 친일파로 돌아선 사례도 무척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고뇌, 마침내 결정하는 신념의 방향에 대해 조명하는 <밀정>의 서늘함이 좋았다. <밀정>은 무작정 독립군 대 친일파, 선악 구도로 몰아붙여 억지 감동,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둡고, 더 차갑게 가장 뜨거울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니 매력적일 수밖에. 한편 김지운 감독이 굳이 다시 한번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단순히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지금 2019년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