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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Nov 06. 2019

모두가 주연인 영화, 혹은 역사

[영화] 1987 (When the Day Comes , 2017)


<1987>은 여운이 깊게 남는 뜨거운 영화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작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기에 극적인 감동은 배가 된다. 죄수번호 503 집권 당시 제작이 진행되어 여러 불이익이 뻔한 상황에서 투자자 모집도 쉽지 않았다. <지구를 지켜라>, <화이> 등을 찍은 장준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지만, 소재가 소재인지라, 그리고 때가 때인지라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하더라. 다행히 수많은 배우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촛불 혁명을 이뤄낸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적절한 시기에 훌륭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특히, 실체가 드러난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 시기에 불이익을 감수하고 참여한 강동원은 이한열 기념사업회가 특히 고마워할 정도였다.


1987년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여진구)이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죽었다. "책상을 턱!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빨갱이 박멸을 외치는 박 처장(김윤석)의 해명에 남영동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최 검사(하정우)는 화장이 아닌 시신 부검을 밀어붙이고, 현장에 남은 흔적과 여러 증언으로 단순 사고가 아니란 게 서서히 밝혀진다. 박 처장은 조반장(박희순) 등 형사 두 명을 구속시키며 꼬리 자르기에 나서지만, 윤 기자(이희준)는 끈질기게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군부 독재 정권에 취재를 이어간다.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역시 비밀리에 수배 중인 재야인사 김정남(설경구)을 돕기 위해 메신저 역할을 자청한다. 그리고 한병용의 조카 연희(김태리)는 미팅을 꿈꾸는 평범한 대학생에서 삼촌의 일을 돕고, 나아가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행동하는 시민으로 거듭난다.



<1987>을 보고 나니 의외로 수많은 유명 배우들이 나온 점에 놀랐다. 최근 주연으로 흥행을 이끈 강동원, 설경구, 여진구는 포스터에서도 보이지 않아 전혀 예상치 못했다. 비중이 크고 작고를 떠나서 의미 있는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배우들이 나섰다. 대사 있는 배우만 무려 125명이라고 하니 짧은 장면에도 오달수, 고창석, 조우진 등 명품 조연들이 러닝타임을 꽉 채웠다. 특히 실제 민주화운동 시위 행렬 선두에 앞장섰던 배우 우현은 영화 내에선 정반대의 악독한 치안본부장 역할을 맡았다. 배역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역사적 의미가 있는 영화 <1987>에 함께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주연인 줄 알았던 하정우는 딱 제 몫만 적절히 해낸 뒤 치고 빠졌고, 유해진 역시 중간 다리 역할을 해줄 뿐 진정한 주인공은 혁명의 흐름에 몸을 던진 모든 캐릭터였다. 즉 129분 동안 스쳐가는 모두가 바로 주연인 영화가 바로 <1987>이었다.


<1987>은 유명 배우들을 캐스팅해 시대 자체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영리한 연출 방법을 사용했다. 그중에서도 돋보였던 배우는 역시 강동원과 김태리였다. 현재와 똑같은 신촌 거리에서 파란색 티셔츠와 하얀색 신발을 입고 쓰러지는 모습은 교과서에서 보던 이한열 열사의 시위 장면과 100% 일치했다. 그는 잘생긴 외모를 무기로 한철 장사하듯 CF만 기웃거리는 배우가 아니다. 매번 부지런히 다양한 작품, 색다른 역할에 몰입해 연구하고 노력하는 배우가 진짜 배우란 생각도 들더라. 신선한 마스크로 <아가씨>로 일약 스타가 된 김태리도 대체 불가능한 느낌이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창조된 캐릭터인 연희 역시 후반부에서 더욱 부각되며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다고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냐"라고 외치는 무기력한 대학생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부당함에 맞서는 혁명의 당사자가 된 캐릭터를 훌륭하게 그려냈다.



6월 민주화운동의 동력은 손에 손잡고 힘을 모은 시민들의 저항과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낸 이들의 원칙 덕분이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취재해서 내보내는 기자,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엄정하게 수사하는 검사, 수감 중인 교도인들이 협박과 접촉에서 자유롭도록 관리하는 교도인. <1987>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군부정권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영웅들의 이야기다. 따라야 할 권력자의 지시이므로, 누군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불의를 방관하는 것도 한패 거리가 되는 것이다. 원리원칙을 강조하던 교도관 역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소신껏 신념에 따라 진술하는 장면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진정한 용기는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파도에 작은 물결이라도 더하는 용기가 필요한 게 인생이다.


혹자는 마지막 장면을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 합창보다 더 오글거린다고 한다. 누군가는 "문재인 대통령 영화 <1987> 관람, 정치 선동에 이용하는 꼴"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1987>은 좌파 우파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논하는 영화다.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직업, 나이에 관계없이 거리로 뛰쳐나온 이들은 1987년 실제 세상을 바꿨다.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여러 사진들을 보면 절대 극적인 과장이나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이란 걸 알 수 있다. 사복경찰이 느닷없이 소지품 검사를 요구하고,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부조리함이 판치던 세상이었다. 지금 누리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의 희생과 투쟁으로 이뤄낸 결과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모교의 정겨운 모습과 대비되는 처절한 시위 현장 장면은 그 어떤 글과 사진보다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다시 한번 정의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 2018년 새해를 여는 영화가 <1987>이라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1987>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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