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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Nov 07. 2019

'타의'로 광주에 갔다가, '자의'로 되돌아간 택시

[영화] 택시 운전사 (A Taxi Driver, 2017)


당시 5·18 상황은 폭동인 게 분명하다
시민을 겨냥해 사격한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영화를 아직 못 봤지만, 정도가 지나치다고 한다면 법적 검토도 가능하다


누군가는 518 민주화운동을 여전히 혼자서 왜곡된 채로 기억하나 보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그날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는 망언과 관계없이 승승장구했다. 일주일 만에 540만 명 관객을 돌파하더니, 결국 천만 관객 돌파에 성공했다. <화려한 휴가>, <26년>, <스카우트>처럼 민주화운동을 정면 혹은 배경으로 다룬 영화들이 적지 않았음에도 <택시운전사>가 지닌 힘은 역시 돋보였다. 여름 대작으로 손꼽았던 <덩케르크>, <군함도>가 입소문 부족, 상영관 독과점 논란 등의 이유로 나란히 힘이 떨어진 가운데, <택시운전사>는 묵묵히 흥행에 성공했다. 평범한 소시민의 시각으로 역사적 사건 한가운데에 휘말리는 '택시운전사' 이야기는 다양한 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낡은 브리샤 녹색 택시 한 대가 전부인 택시운전사 김만섭(송강호). 그는 귀여운 딸 은정이(유은미)와 함께 살며 변변찮은 신발도 사주지 못한 채 집세만 밀려 눈칫밥을 먹는다. 그런 와중에 외국인 한 명을 데리고 광주를 다녀오기만 하면 10만 원을 준다는 말에 곧장 출발한다. 하지만 외부와 차단된 광주에 용기 있게 들어가려는 손님은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였다. 삼엄한 검문에 겁먹은 만섭은 곧장 서울로 돌아가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광주에 함께 잠입한다. 그리고 대학생 구재식(류준열), 택시기사 황태술(유해진) 등의 도움으로 그들은 인권이 말살된 광주의 적나라한 현실을 지켜본다. 공수부대가 무자비하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짓밟고 때리고, 총을 쏘는 지옥에서 그들은 무사히 서울로 돌아가 전 세계에 도움을 요청하려 애쓴다. 물론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 사복 조장(최귀화), 군인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기 쉽지 않지만.



영화는 두 외부인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화려한 휴가>가 사건 피해자의 시각에서 느낀 절망감과 공포를 그렸다면, <택시운전사>는 전혀 상관없는 두 사람이 사건에 휘말려 변화하는 감정선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들은 방관자로 남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광주 시민의 외침에 응답하는 동반자로 거듭난다. 물론 그 과정이 100% 매끄럽고 자연스럽지는 않다. 기자가 된 이유가 '머니'였다는 피터의 한국 취재는 그저 '기자는 편하면 안 된다'는 직업윤리 정도로만 포장되더라. 영화의 시작은 '위르겐 힌츠펜터의 수상 소감'인데, 그에 비해 영화 속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 상대적으로 송강호의 비중이 커지다 보니 생긴 불균형일 텐데, 그래도 인솔자인 택시운전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생생하고 혼란스럽게 이어지는 항쟁 장면은 당시 시민들이 느꼈을 공포를 조금이나마 상상하도록 도왔다.


구닥다리 신파가 아니라 아름다운 드라마로 승화시킨 건 배우 송강호의 힘이다. 딸의 신발을 사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이나 갈림길에서 서울과 광주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은 자칫 뻔한 레퍼토리로 흘러갈 수 있었다. 하지만 소시민 연기에 최적화된 대배우 송강호는 본인만의 빼어난 연기력으로 슬픈 드라마로 영화를 쭉 이끌어간다.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본인의 안위가 제일 먼저인 만섭이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은 매우 공감 간다. 광주를 혼자 빠져나와 고뇌하는 장면은 정말 일품이고, 놀라울 정도다. 국수를 욱여넣으며 왜곡된 뉴스를 보며 느끼는 미안함, 광주에 시민들을 두고 온 것에 대한 죄책감, 하나뿐인 딸이 아른거려 피어나는 그리움.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채 눈물이 서서히 맺혀가는 송강호는 관객들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아간다. 만섭이 '제3한강교'를 흥얼거리며 서울로 돌아가려다 차마 북받쳐 오르는 책임감, 정의, 용기에 따라 광주로 돌아가는 건 명장면이었다.



80년대 광주를 이질 감 없이 재현해낸 배경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하다. 100% 똑같은 크기로 재현한 광주 금남로나 조용필의 '단발머리', 혜은이의 '제3한강교' 등 노래들은 영화를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생생한 배경과 함께 <택시운전사>의 장점은 배우들의 빼어난 호흡이다. 유해진은 특유의 능청스럽고 매력적인 연기로 감초 역할을 제대로 소화한다. (유해진과 송강호와 처음 함께 연기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광주에 진짜 실존했을법한 캐릭터로 생생하게 그 시간, 그 장소의 정서를 몸소 표현했다. 막판 다소 무리한 추격 장면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실제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던 택시운전사의 정의로운 행동을 멋지게 그려냈다. 대학생 류준열 역시 극에 거슬리지 않는 준수한 연기를 선보였고, 다른 조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인상적인 배우는 잠깐 등장했지만 존재감을 톡톡히 보여준 검문소 중위 엄태구다.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긴장감을 극도로 이끌어내는 능력은 송강호 앞에서도 절대 눌리지 않더라.


민주화 운동은 그나마 최근에 일어나 여전히 가해자, 피해자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기에 더욱 슬프고 고통스러운 역사적 사건이다. 지나치게 가볍게, 혹은 왜곡된 시선으로 역사를 그리지만 않는다면 역사적 소재를 다양하게 재가공하는 건 긍정적인 방향이다. <택시운전사>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자연스레 사건에 스며드는 이야기다. 잔인한 악을 정조준하기보다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나약한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그리고 정의로울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그려냈다. 데모를 하는 대학생들을 보며 무더운 사우디에 비하면 한국이 얼마나 먹고살기 좋은지를 구시렁거리던 꼰대 만섭. 그가 1980년 5월 광주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열렬히 흔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타의'에 의해 우연히 불의를 목격했을 때, '자의'로 정의를 선택한다. 그 결정은 어찌 보면 사랑하는 딸아이에게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한편 '기사가 있으면 기자가 간다'는 기자의 소명, '손님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간다'는 택시기사의 직업의식처럼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더 나은 세상에 가까워질 수 있다. (정치인은 제대로 정치를.) 기본에 충실한 게 제일 어려운 법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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