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US OPEN
코로나 19의 시대에 첫 그랜드슬램 대회 US오픈이 열렸다. 올 1월 열린 호주오픈은 코로나 19가 전 세계로 번지기 이전에 끝났고, 프랑스 오픈은 9월로 연기, 윔블던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취소됐다. US오픈은 무관중 경기로 진행됐고, 메인 코트 2개를 제외하고는 아예 선심을 두지 않았다. 또한 단식 예선을 별도로 치르지 않았고, 총 상금과 복식 출전 팀 수도 줄었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많은 선수들도 불참을 선언했다. 지난해 대회 남녀 단식 우승자인 라파엘 나달과 비앙카 안드레스쿠는 나란히 대회에 나오지 않았고, 특히 랭킹 1위 애슐리 바티, 시모나 할렙 등 여자 세계 랭킹 8위 이내 선수 가운데 6명이 불참했다.
게다가 개막 하루 전에는 17번 시드 브누아 페르가 코로나 19 양성 반응을 보여 난리가 났다. 자연스럽게 선수들은 본인의 타월은 스스로 챙기고, 호텔 외출도 제한되었다. 더불어 경기를 마친 선수들은 48시간 안에 나가야 한다는 룰을 신설하며, 권순우는 빠르게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코로나 19로 뒤바뀐 US오픈에 훈훈한 희망의 메시지도 엿볼 수 있었다. 마스크를 착용한 채 경기 진행을 돕는 볼 퍼슨 유니폼에 150여 명의 뉴욕시 의료진들의 이름을 새기며 감사를 표현했다. 미국 테니스의 성지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가 지난 4월 임시 병동, 구호품 창고 등을 세웠던 것의 연장 선상이었다.
국내 랭킹 1위 권순우(73위)가 드디어 US오픈에서 생애 첫 승을 거뒀다. 메이저 대회 7번째 도전만에 거둔 쾌거이며, 이형택과 정현에 이은 국내 세 번째 본선 2회전 진출이었다. 권순우는 예선을 거쳐 작년 US오픈, 윔블던 본선 무대를 밟았지만 1회전에 탈락했고, 올해 호주오픈 1회전에서 바실라쉬빌리에게 아쉽게 2대 3으로 패했지만, 공격적인 스트로크로 희망을 봤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국내 훈련에 매진하고 약 6개월 만에 공식 대회에 나섰는데 1회전 상대는 타이손 크위아트코스키(미국,187위)였다. 1회전 시드 선수를 피했지만, 올해 초 챌린저대회 우승도 거뒀고 강서브로 하드코트에 특화된 선수라 방심할 수 없었다.
권순우는 첫 세트 3-6으로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하지만 한 템포 빠른 공격적인 포핸드 위닝샷이 본격적으로 불을 뿜으며 2세트를 타이브레이크 끝에 가져왔다. 4-4 상황에서 서브 게임을 내줬지만, 곧바로 브레이크에 성공하는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였다. 특히 백핸드로 상대를 몰아넣고 재빠르게 네트로 달려들어 성공한 발리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후 크위아트코스키는 3세트부터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며 무너졌고, 권순우는 안정적인 그라운드 스트로크로 3세트(6-1), 4세트(6-2)를 따내며 역전승에 성공했다. 1회전 포핸드 위닝샷 1위(25개)를 기록할 정도로 공격적인 포핸드와 3,4세트를 지배한 체력이 빛을 발했다.
2회전 상대는 21세 신성 데니스 샤포발로프(17위)였다. 샤포발로프는 2017년 US오픈 16강에도 올랐고, 올해 1위 랭킹 13위까지 오르며 향후 탑 10 진입이 확실시되는 선수다. 강력한 서비스는 물론 날카로운 원핸드 백핸드도 일품인 선수지만, 첫 세트의 승자는 권순우였다. 타이브레이크에서 2-5까지 끌려갔지만, 더블 폴트로 샤포발로프가 흔들리자 5연속 득점을 하며 경기를 뒤집었다. 하지만 2세트에만 서브 에이스를 9개나 터뜨린 샤포발로프가 컨디션을 되찾으며 세트를 따냈고, 권순우는 체력적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1-3으로 3시간 41분의 승부 끝에 패했다. 3세트에 먼저 브레이크를 해낸 뒤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던 점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랜드슬램 무대 첫승을 거둬 자신감을 얻었고, 다음 프랑스 오픈에서의 활약을 예고했다.
조코비치(1위)의 올해 26전 전승 기록은 US오픈 16강에서 멈췄다. 빅3 중 페더러, 나달이 대회에 불참했고, 16강에 진출한 선수 중 메이저 대회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는 칠리치가 유일해 조코비치의 우승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1,2회전 역시 무난하게 승리하며, 코로나 19 완치 이후에도 건재한 실력을 뽐냈다. 하지만 조코비치는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그랜드 슬램 18번째 우승을 어이없게 놓쳤다. 카레노 부스타(27위)를 상대로 1세트 연달아 스코어를 내주자 홧김에 베이스라인 뒤로 공을 쳐버렸다. 이 공은 선심의 목을 강타했고, 심판은 규정대로 조코비치를 실격 처리했다. 대회 탈락은 물론 랭킹 포인트, 상금을 반납하고 벌금까지 내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 조코비치는 SNS를 통해 고의가 아니었다고 사과했지만, 허무한 탈락은 돌이킬 수 없었다.
오사카 나오미의 생애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은 2년 전 US오픈이었다. 감격적인 첫 우승임에도 오사카 나오미는 "이렇게 끝나서 미안합니다"라며 침울하게 우승 소감을 밝혔다. 결승전 상대 세레나 윌리엄스가 주심과의 신경전에 격분해 라켓을 집어던지고 강하게 항의하다 자멸했기 때문이었다. (주심은 경기 중 코칭을 문제 삼았고, 세레나는 부당한 판정이라며 거세게 심판과 싸웠다.) 실망한 관중들은 싱거운 경기에 야유를 보냈고, 오사카 나오미는 마치 죄인처럼 웃지 못했다. 하지만 2020년 US오픈 우승을 확정 짓고 오사카 나오미는 환하게 웃으며 승리를 만끽하고, 비록 무관중이지만 통산 3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을 자축했다. 결승전 상대는 빅토리아 아자렌카(27위)였다. 2012년, 2013년 두 번이나 US오픈 결승전에서 세레나 윌리엄스에 졌던 아자렌카는 준결승에서 그녀를 꺾고 기세가 등등했다.
게다가 아자렌카가 첫 번째 세트를 6-1로 30여 분도 안 되는 빠른 시간에 따냈다. 오사카 나오미는 첫 세트에 무려 13개의 범실을 범하며 무너졌고, 2세트 첫 서브 게임마저 내주며 0대 2로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오사카 나오미는 침착한 코트 커버와 강력한 포핸드로 반격에 나섰다. 특히 평균 170km/h를 자랑하는 퍼스트 서브가 본격적으로 꽂히면서 서브 에이스가 5개나 나왔고 흐름을 뒤바꿨다. 이후 중요한 듀스 상황에서 오사카 나오미는 기막힌 리턴과 포핸드 위너로 2세트를 따냈다. 젊은 오사카 나오미가 갈수록 스트로크가 무거워졌는데 비해 아자렌카는 체력적 부담을 노출하며 마지막 세트도 아쉽게 3-6으로 내줬다. 짜릿한 역전승을 거둔 오사카 나오미는 2018 US오픈, 2019 호주오픈에 이어 현역 여자 선수 중 유일하게 20대에 메이저 3승을 차지했다. 특히 메이저 결전 승률 100%를 자랑하며 큰 경기에 강한 면모도 보여줬다. 한편 오사카는 매경기 인종차별 문제로 숨진 흑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마스크를 쓰고 등장해 사회적 이슈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가 여전히 나눠먹는(?) 메이저 대회에 드디어 새로운 얼굴이 나왔다. 2018년~2019년 프랑스오픈, 올해 호주오픈 결승전까지 올랐으나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 도미니크 팀이 주인공이었다. 차세대 스타 알렉산더 즈베레프(7위)와 4시간 1분간 풀세트 접전을 펼친 끝에 극적인 대역전승을 거뒀다. 즈베레프는 준결승에서 카레노 부스타를 상대로 0대 2에서 3대 2 역전승을 거두었는데, 결승전에선 반대의 결과를 맞이했다. 첫 세트는 완벽히 즈베레프가 압도했다. 팀이 첫 서브 성공률이 37%밖에 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즈베레프는 안정적이면서 강력한 서비스와 적극적인 네트 플레이로 경기를 리드했다. 2세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팀의 첫 서브가 살아나고 스트로크가 안정을 찾았지만, 즈베레프의 코트 커버력이 한수 위였다. 하지만 무려 5개의 더블폴트를 범하며 조금씩 불안함을 노출했다.
싱겁게 끝날 것 같던 결승전은 3세트에 불이 붙었다. 즈베레프는 서브 에이스를 4개 따냈지만, 더블폴트를 똑같이 4개나 내주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팀은 강력한 포핸드와 적극적인 백핸드 스트로크로 기어이 6-4로 3번째 세트를 가져왔다. 호쾌한 스트로크가 살아난 팀은 끈질기게 공을 받아냈고, 즈베레프는 12개의 범실을 범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허벅지 근육 경련에 팀이 잠시 주춤했지만, 뒷심을 발휘해 차근차근 중요한 포인트를 쌓아나갔다. 결국 급격하게 뒤바뀐 흐름에 마지막 세트는 타이브레이크까지 이어졌다. 훌륭한 코트 커버를 선보이던 즈베레프는 하지만 긴장감과 체력적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더블 폴트를 2개나 내주며 무너졌다. 반면 팀은 상대의 네트 대시를 침착하게 확인하고 패싱샷을 시도했고 끝까지 침착한 모습으로 결국 우승을 따냈다. 2016년 바브링카 이후 처음으로 빅3가 아닌 차세대 슈퍼스타가 정상에 오른 뜻깊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