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해외봉사 이야기
떼이꺼 뽀또, 플리즈 (Take a photo, please)
2018년 겨울은 무척이나 더웠다. '겨울'이란 단어를 마주하면 언제나 '전기장판'과 '귤'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금은 달라졌다. 아마 "뽀또(Photo)"란 인도식 영어 발음이 잔뜩 담긴 단어가 평생 맴돌 것 같다. 나는 평생 가보지 못할 것 같던 인도로 2주간 봉사활동을 떠났다. 회사 차원에서 하는 사회공헌 활동에 반강제 차출(?)되어, 대학생 25명을 이끌고 가는 일정이었다. 회사 동료들은 바쁜 연초에 2주가량 자리를 비운다며 부러움과 축하의 눈초리를 받았다. 내심 공식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사무실을 떠날 수 있어서 흐뭇했지만, 부담이 사실 더 컸다. 그저 시키는 일을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하는 게 일상인데, 과연 내가 누군가를 책임감 있게 통솔할 수 있을까? 그것도 한 번도 가보지도 못한 이국땅 인도에서?
사실 인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컸다. '물을 잘못 마시면 무조건 화장실행이다.', '도로에는 차보다 소가 더 많다.'는 등의 이야기보다 두려웠던 건 의외로(?) 까다로운 내 입맛이었다. 치킨, 야채, 그린, 정체 모를 커리를 삼시세끼 손으로 먹는다는 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크나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기우라는 건 도리어 살이 쪄서 돌아온 내 몸뚱이를 보며 알 수 있었다. 싱가포르를 경유해 거의 12시간 넘게 날아간 인도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버스 창문 너머로 도로 위를 자유롭게 쏘다니는 소를 볼 수 있었고, 신호 따윈 무시하고 경적을 울려대며 질주하는 오토바이와 경차가 장관을 만들어냈다. 그곳은 '무규칙'이 곧 '규칙'이었다. 아슬아슬 서로를 피해 가면서 안전하게 제 갈길을 가더라. 2주간의 봉사활동도 이와 비슷했다. 정해진 작업량이나 프로그램 없이 학생-NGO-기업이 자율적으로 규칙을 만들어나가는 그런 방식이었다.
봉사활동 지역은 인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안드라프라데시주 아난타푸르였다. 델리, 뭄바이, 첸나이 등 적어도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어깨너머로 들어본 도시도 아니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난타푸르 중에서도 시골 마을 랍타두, 페누콘다로 향했다. 학교 시설 보수, 묘목 심기, 벽화 그리기, 아이들을 위한 교육 봉사, 문화 공연 등이 주된 봉사활동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줄 인도인 대학생 봉사단원 4명까지 합류했고, 거의 1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매달리니 의외로 척척 성과가 나타났다. 갈라지고 지저분한 건물 벽은 어느새 귀여운 캐릭터가 뛰노는 알록달록한 공간으로 변했고, 푸석한 모래밭에 물길과 작은 나무들이 아담하게 자리잡았다. 힘든 스케줄에 투덜거릴 거라 걱정했던 대학생들은 진정 즐거운 마음으로, 본인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며 열심히 땀을 흘렸다. 나는 살기 위해 우걱우걱 간식도 먹었고, 학생들 앞에서 전혀 피곤하지 않은 척 다크 서클을 선크림으로 감췄다.
지금도 어린 인도 학생들이 가끔씩 생생하게 떠오른다. 세상에 어린 시절이 예쁘지 않은 사람이나 동물이 어디 있겠느냐만, 인도 아이들의 눈은 참으로 신비로웠다.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색종이 바람개비 하나에도 한없이 맑은 웃음을 지었고, 열심히 한국말도 따라서 대답했다. 그리고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옹기종기 모여 봉사단원을 맞이했던 장면은 환상적이었다. 박수를 치고, 악수를 하고,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노래를 부르고. 모두가 행복한 마을 잔치가 펼쳐졌고, 이런 진심 어린 환대를 받고 허투루 봉사를 할 수 없었다. 그중 제일 뿌듯했던 시간은 '교육 봉사'였다. 바리바리 한국에서부터 준비한 교보재, 그럴싸한 책상도 없는 열악한 교실, 놀이와 교육의 비율이 7대 3인 수업 내용. 무엇하나 완벽한 건 없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완벽했다. 조를 짜서 모든 단원들이 몇 시간씩 아이들과 만났지만, 유독 정이 든 친구들도 있더라.
지원이는 열심히 교보재를 만들고, 한글 자료를 영어로 번역한 부지런한 교육부장이었다. 교육대학을 다니고 있어 남들보다 '교육'이 낯설지 않을 거란 막연한 이유였다. 수십 년간 아이들을 가르쳐온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그것도 타지에서 외국인을!), 남들과 동일한 강도의 일을 하면서 부가적으로 준비해야 할 게 무척 많았다. 하지만 스스로 책임감을 갖고, 늘 웃는 얼굴로 봉사에 임했다. 게다가 노력하는 친구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여러 친구들도 자발적으로 함께 힘을 모으고 다독여 문제없이 수업을 잘 이끌었다. 그리고 유독 지원이를 잘 따르던 어린 인도 학생이 있었고, 문제는 마지막 날 터졌다. 모두들 입는 푸른색 교복이 아닌, 예쁜 전통 의상을 입고 잔뜩 기대된 얼굴로 지원이를 찾아왔다. 너무나 고맙고 친절한 선생님과 사진을 찍고 싶다는 것이었다. "떼이꺼 뽀또, 플리즈(Take a photo, please)"
워낙 아이들이 휴대폰 셀카를 보면 신기해하고, 처음 보는 렌즈 속 자기 얼굴에 웃음을 터뜨리곤 해 사진 요청이 그리 놀랍진 않았다. 하지만 인도 봉사단원이 통역을 도와줬는데 그 의미가 아니었다. 휴대폰이 아닌 사진관에 가면 안 되냐는 말이었다. 본인은 휴대폰이 없어서 평생 사진을 간직할 수 없고, 딱 한 장이라도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손수 집에서 모아둔 돈도 들고 왔다며. 사진관도 바로 학교 건너편에 있고, 정말 금방이면 된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단체 일정에서 잠시의 개인 자유시간은 허락되지 않았고, 어렵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너무나 아쉬운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 멀리 한국에서 온 좋아하는 선생님 앞에서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은지 얼굴을 숨기면서. 대신 집에서 가져온 조그마한 선물을 지원이에게 주면서 손을 꼭 잡았다. 지켜보는 나까지 괜히 가슴이 짠해졌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휴대폰으로 최대한 아름답게 둘을 찍어주는 것뿐이었다. 사람 사이에 인연이 피어나고, 마음이 깊어지는 데 '시간'은 그리 중요치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봉사를 떠나기 전 여러 가지를 미리 배우고 숙지했다. '소확행', 'TMI', '롬곡옾높' 같은 20대들의 신조어를 익히는 것보다 중요한 건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See you later", "See you again", "See you next time.". 너무나 평범한 인사말이지만, 그들에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태어나 처음 만난 신기한 외국인들의 뻔한 인사말에도 순수한 아이들에게는 대책 없는 희망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걱정이 아니란 건 사진관에 가고 싶어 고사리손에 동전을 쥐고 온 아이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스펙 쌓기가 목적이든, 사무실 탈출이 목적이든, 적어도 봉사를 하는 동안 진심을 다했다면, 이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아름답게 남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무사히 인도에서 돌아오고 일상은 다시 시작됐다. 여전히 회사에서는 눈치 보기 바쁘고, 칭찬보다는 지적질이 익숙하다. 추운 겨울이면 '무더위'가 아니라 '미세먼지+추위'를 피하기 위해 마스크와 패딩으로 중무장한다. 하지만 가끔씩 무더운 겨울, 인도에서 보낸 잊지 못할 2주를 떠올리며 웃음 짓곤 한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같이 하는 가치'를 전하고, 소중한 인연을 전국, 아니 머나먼 인도 어딘가에 만들었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면서 말이다.
(사진 출처 : Jihye Jang, My ph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