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은 1인용이지만, 누군가가 닫아줘야지
집에 가서 먹으면 안 돼? 왜 혼자 먹어.
고기를 먹으러 혼자 마포 갈매기를 찾았다. 전화기 너머로 매우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영화관, 식당, 도서관, 콘서트, 여행.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한 나는 순간 의아했다. 내 돈 내고 내가 먹는 건데 뭐가 이상하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혼자 고기를 구워 먹는 손님은 뭔가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늘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했고, 실제로 친구도 많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혼자 있는 게 편할 때가 종종 있었다. 아니 꽤 많았다. 나는 싫어도 싫은 티를 최대한 안 내는 편이지만, 반대로 호불호는 매우 강하다. 고집도 무척 세다. 친한 사람에게는 편하게 좋고 싫음을 잘 말하고, 합리적으로 적정선에서 타협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조금 어렵거나 불편하면 어영부영 웃으며 웬만하면 상대방에 맞추곤 한다. 그래서인지 싫은 티 안 내고 억지웃음 짓는 것보다 내 마음대로 편하게 꾸미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도 처음부터 혼자가 편하진 않았을텐테..... 천천히 생각해보니 몇몇 일을 겪으며 남의 시선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변한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선생님께서 반장인 나를 불러 전교생 앞에서 시를 낭독하라고 하셨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나름 열심히 하는 아이라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외우고 또 외웠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열 줄 가까이 되는 시였는데(시라기보다는 뭔가 오글거리는 웅변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닝 페이퍼를 주머니에 넣어 갔다. 수련회 마지막 날 클라이맥스 캠프파이어를 알리는 자리였다.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몇백 명이 되는 아이들이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열심히 외운 문구들은 새하얗게 날아갔다. 사실 어떻게 끝마쳤는지 기억도 안 났는데, 선생님께서 침착하게 종이를 보고 잘 읽었다고 칭찬해주셨다. 나는 내려오면서 미치도록 부끄럽고 두려웠다. 다른 아이들이 긴장해서 벌벌 떠는 날 우습게 보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다들 순진하게도 촛불을 들고 어머님 은혜를 부르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울먹거렸다.
그때 깨달았다. 생각보다 남들은 타인에 대해 내가 걱정하는 것만큼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걸.
고등학교 2학년. 남녀합반이었다. 축구를 잘하는 친구들과 떨어져서 체육 대회를 어떻게 치러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두고 수군거리는 애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부분 관심과 호감의 이야기였으니 나쁠 게 없었다. 살갑게 굴면 살갑게, 친절하게 대하면 적당히 웃으며 무던하게 잘 지냈다. 너그럽고 수더분한 성격이라 모두와 친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무섭게도 뒷말이 들리고, 막상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는 애들이 교묘게 헛소문을 퍼뜨렸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전전긍긍하기보다는 내가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뒤통수를 치니 씁쓸했다. 워낙 좋은 인연, 친구들이 많았기에 큰 문제없이 즐거운 추억으로 학창 시절을 채우긴 했다. 하지만 묘하게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진심을 다하려고 억지로 애쓰고 초조해 봤자 나만 손해라는 걸.
재수생 시절. 나는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닌 부유하는 존재였다. 소속감이 없다는 것. 그건 곧바로 불안함으로 이어진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재수 초반에는 하루하루를 보내기보단 꾸역꾸역 버텼다.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건 모의고사 점수, 배치표 따위가 아니라 내가 기댈 집단이 없다는 점이었다. 떡볶이 세트. 김치볶음밥. 도시락 백반. 조미료 덩어리 음식들은 내 몸을 갉아먹는 기분이었고, 하루빨리 지긋지긋한 도서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벚꽃 놀이, 대학 축제, MT. 술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런 사소한 대학생의 일상이 부러웠다. 그리고 샘도 많이 났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다. 집단 속에서 자신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내면으로 파고들어 잠잠한 상태가 되었다. 마음이 복잡할수록 몸은 단순해졌고, 자연스레 상념도 사라졌다. 30분간 자전거로 도서관 도착. 조간신문 2개 읽기. 언수외탐 문제 풀기, 인터넷 강의 듣기. 답답하면 행궁을 돌아다니고, 축구장에도 부지런히 갔다. 나른하게 낮잠을 자고, 읽고 싶은 책도 원 없이 빌려봤다. 스페인 여행 DVD를 보면서 마냥 '배낭여행'을 꿈꾸기도 했다. 마치 대학생이 되면 외국인 친구 3~4명과 펍에 나란히 앉아 엘 클라시코에 대해 떠들어 대리라 막연히 생각하면서. (퍽이나.)
그때 깨달았다. 힘든 시기에는 결국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는 게 정답이라는 걸. 자신이 아닌 집단에 푹 빠져버리면 위험하단 걸.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니 혼자라면 결코 해내지 못했을 일이 많았다. 보잘것없는 내가 훨씬 괜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 참 많았다. (물론, 지나치게 남들 눈치 살피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건 싫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자.'가 내 좌우명이 된 것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
초등학교 3학년. 정신 못 차리는 나한테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칭찬해주던 친구가 없었다면?
고등학교 2학년. 에픽 하이 음악을 나눠 듣고, 축구, 농구를 미친 듯이 함께하던 친구가 없었다면?
재수생. 시답지 않은 농담은 식상했지만, 자주 찾아와 치킨이며 초밥을 토할 때까지 먹었던 친구가 없었다면?
말로는 "인생 혼자다.", "관은 1인용이다."를 외치지만 여전히 눈치도 많이 보고, 걱정도 많이 한다. 샘도 많고, 정도 많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느끼는 거라면, 절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항상 감사하고, 표현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자.
그러면 아무리 '나 혼자' 있더라도 '나 혼자'는 아니니깐.
관은 1인용이 맞지만, 누군가가 닫아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