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묵묵하게 버티는 삶.

[도서] 스토너, 존 윌리엄스

by 샘바리

존 윌리엄스의 장편 소설 <스토너>는 재미없는 한 남자의 일대기다. 거창한 모험이랄 것도 없는 게, 미주리 대학에서 크게 벗어난 적도 없다. 열정적인 사랑에 흠뻑 빠지지도 않았고, 그저 진정한 사랑을 뒤늦게 만나 고민에 빠졌다가 조용히 흘러갔다. 정치판이나 다름없는 대학 교수 사회에서도 조용조용 자기가 할 일을 묵묵히 하며 끝까지 버텨 정년을 맞이했다. 미주리 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은 존 윌리엄스가 분명 허구의 장소, 허구의 인물을 담아냈다고 말했지만, 너무나도 거울을 보는듯한 소설이었다. 실제 잊힌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 뒤늦게 재조명을 받는 <스토너> 작품마저도 그를 닮았다.


농촌, 아니 깡촌에서 태어나 대학교에 처음 들어와 자신이 평생 함께할 학문을 맞이하는 스토너의 신비로운 경험은 그저 놀라웠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그려온 분주한 대학 캠퍼스, 지적인 대화가 오가는 교실의 모습과 같았다. 칠판에 적힌 공식을 빼곡히 받아 쓰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몸으로라도 외우곤 했던 정답들이 고등학교의 전부였다면, 대학은 달랐다. 괴짜 교수는 질문을 던져놓고 학생들은 자유롭지만 치열하게 자신의 생각을 주고받는 그런 지성의 무대가 대학교였다. 물론 책과 달리 실제 대학교의 여러 모습은 그저 고등학교의 확장판, 취업 준비를 위한 중간 단계였지만, 나는 '철학과'라는 다소 마이너 한 전공을 택했기에 이런 로맨스는 종종 있었다. 대학교에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세계 각국의 <스토너> 표지


슬론의 시선이 윌리엄 스토너에게 되돌아왔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스토너를 괴롭힌다고 봐도 무방한 아내 이디스와의 삐거덕거림에도 그는 꾸준히 책을 읽었다. 딸 그레이스와 가장 행복하고 빛나는 추억이 담긴 곳도 서재다. 사실 스토너는 그리 유쾌하거나 주목받을 캐릭터는 아니다. 심지어 다들 분위기에 휩싸여 참전하던 세계대전 시기에도 그저 자기가 할 일, 가장 하고 싶은 공부를 이어가니 말이다. 친구도 학장인 핀치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로맥스 교수가 죽도록 미워하며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스토너를 괴롭힐 때도 스토너는 그저 힘들어하며 불편한 강의를 이어 간다. 사실 요즘 한국 대학 사회를 보면 정교수 자리에 올라 정년까지 저술 활동도 한 그는 성공한 삶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은 끊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면 화려한 성공을 위해 도전하거나 핏대를 높일 법도 한데. 속 시원하게 화를 내기는커녕 그저 자리를 쓰윽 피하는 게 전부인 스토너는 애초에 싸움닭이 아닌 곰 같은 사람이었다. 버티는 삶, 어찌 보면 요즘 세상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갖춘 스토너의 삶을 함부로 성공이다, 실패다 재단하긴 이르다. 슬픔과 고독을 견디며 자신만의 길을 걸은 그가 행복했을지, 아니면 불행했을지는 오롯이 자신의 영역이니 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제넘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넘어 연민의 감정으로 다가가면 오히려 불편할 수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이라고 느껴지더라도 그 길을 택한 건 결국 본인이고, 그가 주인공이니 말이다.


가장 빛나는 추억이 많은 공간, 서재. (출처 : Unsplash / Alfons Morales)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시켜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딸 그레이스와의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어주고, 도란도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귀여운 딸아이는 엄마의 강압에 이끌려 자신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극단적인 임신, 결혼이란 도피를 통해 벗어날 때까지, 그리고 술에 잔뜩 중독되어 몸을 못 가눌 때도 스토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식탁 머리에서의 예의를 강조하며, 아이를 자신의 인형으로 길러내려던 아내에는 당당히 맞섰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레이스가 원했던 것은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대화. 그것만이 그녀가 원했던, 그리고 흔들리는 그녀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결코 그 어떤 가치관도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의 시간보다 중요하지 않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일이 얼마나 화려해도, 가족이란 근원적 힘이 없다면 허망한 알맹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스토너의 묵묵히 버티는 삶에 많은 공감을 하는 차분한 성격의 나지만, 이것 만큼은 결코 따라 할 마음이 1%도 없다. 내 인생이 중요한 만큼,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가족의 영역도 소중하니 말이다.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묵묵히 버티지 않고 기꺼이 맞서 싸울 것이다. <스토너>는 배우 톰 행크스의 말처럼 "그저 대학에 가서 교수가 된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모든 평범한 인간이 그런 것처럼 외롭고, 좌절하고, 슬퍼하고, 고민한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버터내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다시 이겨낸다. 이 책이 뒤늦게 주목받은 이유는 평범한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응원의 메시지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전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하루가 겹겹이 쌓여 특별한 일생이 되길 기도한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마침내 스토너가 말했다.
"뭐, 걱정 마라. 다 잘될 거야.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네가 원하는 일이 무엇이든, 다 잘될 거야."
"네." 그레이스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의자에서 일어나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랑 저, 이제는 이야기를 할 수 있네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주리주. 아마도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서 묵묵히 지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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