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공채형 인간, 사과집
모범생 증후군으로서 과락 없는 인생을 살아왔고,
공채 덕분에 입사했지만 공채 때문에 퇴사한 한 사람의 기록.
<공채형 인간>은 퇴사의 바다, 브런치에서 내 눈을 단숨에 사로잡은 매거진이었다.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한 과감한 퇴사 결정, 퇴사 이후 후련하면서도 불확실한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긴 글은 사실 흔했기에, 그저 그런 퇴사 스토리라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료,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쳤을 수도 있는 이의 진솔한 이야기란 점에 갑작스러운 호기심이 생겼다. 직무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 어영부영 5년이 흐른 나에게 제법 흥미로운 주제였고, 공감 가는 글이었다. 무엇보다 공채형 인간에서 말하는 '공채 때문에 입사하고, 공채 때문에 퇴사하는' 한 사람이 너무나 닮아 보였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이대로 끓는 물에 죽는 개구리가 되는걸까? 아이러니하게도 저자가 이미 떠난 회사 도서관 신간 코너에 위치한 '퇴사 이야기'에 홀린듯 손이 갔다.
적성에 맞는 걸 찾아서 나가는 게 아니라.
나가서 적성을 찾고 싶다.
- 적성 찾기
저자 사과집은 '경영지원' 업무에 인사, 총무 등 세부 직무가 아닌 '경영을 잘 지원'하겠다는 내용으로 자소서를 썼다. 사실 나도 '홍보' 직무에 대해 정확히 모른 채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철학'이란 절대 환영받지 못하는, 다시 말해 먹고 살기 어려운 전공 1등을 다투는 인문학 졸업이라 '전공 무관'이란 단어를 먼저 찾기 바빴다. 막연히 글을 쓰는 업무가 수십 장씩 써 내려간 에세이, 서평과 닮아 보여 억지로 공통분모를 찾아냈다. 엄청난 행운이 따라 고만고만한 능력에 운 좋게 입사에 성공했지만, 사실 나도 여기에 최적화된 인재라는 확신은 여전히 없다. 그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란 자신감 넘치는 신입 시절 의욕(이라 쓰고 노예 마인드라 읽는다.)은 어느덧 불만과 짜증으로 바뀌어 하루하루 스트레스를 빚어내고 있다.
내 삶과 일상을 통제할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넓은 가능성 안에서 진로를 그리는 것입니다. 생활 면에서는 예상 가능한 일상을 살 수 있으며(Work and Life Balance) 커리어 상으로는 회사 안에서 다양한 진로의 가능성을 꿈꾸고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Career Path)
- 퇴사 때 실장님께 보낸 메일
실장님에게 보낸 저자의 퇴사 메일은 상당한 고민의 깊이가 느껴져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겨줬다. 조직문화 개선, 업무 개선, 동기가 떨어지는 순간, 남성적인 문화, 사원 대리들의 고민. 나가는 마당에 과감히 쓸 수 있는 이야기들에 공감 가는 부분도 있었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실제로 나아졌다고 피부로 와 닿는 점도 제법 있었다. 회사도 그룹 전체의 위기에 공감하고, 이를 바꿔나가야만 생존한다는 자각이 조금씩은 피어난다고 본다. (물론 워낙 무겁고 거대한 조직이라 단숨에 바뀐다는 게 불가능하다.) 나 역시 비슷한 환경 속에서 온갖 인간 군상들과 마주하며 워라벨과 커리어 사이의 밸런스를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한 건 예전 시대와 달리 더 이상 회사는 나의 미래를 책임지고, 명운을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게 꼭 나의 자발적 작별인 '퇴사'가 아니라, 기업 전체의 '몰락'이 될 수도 있으니.
내가 맡은 이 업무는 아무나 시작할 수 있지만 모두가 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업무가 가진 파급효과를 알아야 한다.
인생은 못 바꿔도 일을 통해 회사를 바꿀 수는 있다.
- 인터뷰
매주 나오는 '공채형 인간'의 위클리 매거진을 기다리며 읽는 재미도 쏠쏠했고, 작가 개인의 일상이 담긴 <공채형 인간> 책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사과집이 써 내려간 퇴사의 고민, 조직의 불합리, 개선 방향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퇴사'가 아닌 '출근'이라는 쳇바퀴를 다시 굴린다. 고과 평가 C도 받아봤고, 무의미한 면담도 해보고, 불합리한 제도에 불평하다가 어느새 찍힐까 두려워 조용히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러니하게 회사에 더 다닐 이유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만난 몇 안 되는 '멋진 어른'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기도 하고. 좋아하는 선후배와 맛있는 저녁, 즐거운 운동을 함께 즐기며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법도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만의 커리어를 탄탄히 쌓아가고 있는 몇 극소수의 훌륭한 사람들도 만났다. 그저 억대 연봉만 받아먹는 썩어빠진 꼰대,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 구제불능 기업. 남 탓만 하고 스트레스로 좀먹기에는 너무나도 나는 소중하고, 그런 회사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동료가 나간다고 떨어질 만한 모티베이션이나 애사심이면, 그 회사에 문제가 있는 거다.
-퇴밍아웃
저자의 말처럼 나의 무능력을 회사에 애정이 없다는 말로 변명하진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의지만 확고하다면 충분히 회사에서 빼먹을(?) 제도나 교육 기회는 풍부한 편이다. 그저 신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어차피 불합리한 제도에서 욕심내 봤자 실망만 한다고 자위하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시키는 일만 대충 시간 봐가면서 뭉개고 때우지 말고, 내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조금씩 해나가야겠다. 물론 거창한 커리어 패스에 대한 기대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경험을 기다리는 건 아니고. (그게 가능하면 돈을 받고 다니는 회사가 아니라 돈을 내고 다니는 천국이겠지.)
회사에 대한 기대치는 낮추되, 나에 대한 기대치는 높여야겠다. 회사와 내가 동일시되지 않는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도전이고, 조금씩이나마 내가 성장한다는 느낌만큼 훌륭한 자극제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제일 확실한 건 높은 임금이다. 인정.) 언젠가 회사를 떠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스페인, 포르투갈로 <88일간의 건축기행>을 떠나고, <캐리어 속 우쿨렐레>를 들고 새로운 취미를 배워가는 사과집의 글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면서. 아직은 더 배울 게 남았고, 여전히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서고 있다.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의식적으로도 더 질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 나머지는 얼른 후다닥 퇴근하고 나서 더 생각하자.
나는 더 이상 회사에서의 내 미래가 궁금하지 않기에 나간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서의 미래가 궁금한 다른 이들에게, 이 회사가 더 좋은 곳이 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
그 후의 이야기
나도 티끌만큼이라도 이 회사가 더 좋은 곳이 되는 데 보탬이 되길.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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