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메리칸 셰프 (Chef, 2014)
<아메리칸 셰프>는 눈과 귀가 즐거운 영화다. "빈속으로 절대 보지 말 것"이란 홍보 문구처럼 군침이 절로 도는 맛있는 음식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최고급 요리부터 길거리 음식까지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특히 푸드트럭의 메인 메뉴 쿠바 샌드위치는 백미다. (이 영화를 보고 가수 윤종신이 '쿠바 샌드위치'란 곡을 만들 정도였다.) <아메리칸 셰프>의 장르를 굳이 고르라면 '푸드 휴먼 코미디'다. 음식을 소재로 그들을 둘러싼 가족 간의 사랑과 일의 소중함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마블 시리즈로 익숙한 감독 겸 배우 존 파브로는 이번엔 직접 불같은 성격의 요리사로 등장한다. "네가 이 요리를 만들 때까지 나와 스태프들의 노력을 알기나 해?"라고 음식 비평가에게 울분을 토할 때는 묘하게 '요리'가 '영화'로 겹쳐 들리기도 한다.
LA 고급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잘 나가는 칼 캐스퍼(존 파브로)는 일벌레다. 아들 퍼시(앰제이 앤서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의무적으로 챙길 뿐 오로지 '요리'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과 서먹해도 언제나 일터인 레스토랑에서는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레스토랑 주인 리바(더스틴 호프먼)과 메뉴 결정권을 놓고 계속 다툰다. 항상 새롭고 독창적인 요리를 시도하는 칼에게 리바는 "예술가 흉내를 내지 말고, 손님들이 좋아하는 기존 메뉴나 내놓으라"라고 소리친다. 결국 고용주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던 칼은 어마어마한 모욕을 듣는다. 바로 유명 음식 평론가이자 파워블로거인 램지(올리버 플랫)의 악평이었다. "칼 캐스퍼는 자신감 없는 할머니처럼 변했다"는 참혹한 트윗에 칼은 모욕감을 느끼고 곧바로 쏘아붙인다. 하지만 SNS 초보인 칼은 공개적으로 램지를 욕하고, 심지어 식당에서 초콜릿을 퍼부으며 자신의 요리에 대한 자부심을 뽐낸다. 졸지에 SNS 유명 인사가 된 칼은 일자리를 잃고 아내 이네즈(소피아 베르가라)의 조언으로 푸드 트럭을 시작한다. 엘 헤페(El Jefe)란 이름의 푸드 트럭의 탑승자는 레스토랑 부주방장 마틴(존 레귀자모)과 아들이다. 이들의 메인 메뉴는 쿠바식 샌드위치, 행선지는 마이매미, 텍사스, 뉴올리언스, LA로 이어진다.
<아메리칸 셰프>의 메인 메뉴가 '요리'라면 사이드 디쉬는 'SNS'다. SNS '화제의 영상' 주인공 초보 칼 캐스퍼는 SNS의 빛과 그림자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자리를 잃은 것도 아들이 설치해준 트위터로 멘션을 보낸 것이 발단이었다. (사실 나도 트위터를 쓰지 않아, 어떤 실수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온라인에서 조롱당한 칼의 요리는 순식간에 '명품'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실제 음식도 맛보지 않은 이들의 악플은 빠르게 퍼져나간다. 게다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초콜릿 케이크'의 본질을 설파하며 호통을 치는 모습은 좋은 떡밥으로 자리매김했다. 악플러에게 실제 맛은 중요하지 않다. 휘발성으로 빠르게 웃고 떠들 소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내의 소개로 홍보 담당과 통화하는 내용은 유쾌하면서도 씁쓸하다. 또 다른 자극적인 이슈가 터지면 쉽게 칼의 분노 영상을 잊힐 것이며, 이를 계기로 차라리 TV 프로그램에 출연해보라는 제의였다. 한 사람의 세계가 무너질 정도의 상처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돈벌이에 유익한가 아닌가로 평가받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칼이 재도약하는 계기도 SNS다. 칼의 푸드트럭 메뉴는 흔하디 흔한 샌드위치다. 버터로 살짝 구운 식빵에 머스터드 소스를 바른 후, 치즈와 돼지고기 슬라이스, 햄 등을 넣고 바삭하게 굽는 간단한 메뉴다. 아무리 맛있어도 쉽게 튀기 힘든 평범한 메뉴지만 SNS에서 입소문을 타면 말이 달라진다. 사랑스러운 아들은 마이애미부터 LA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쉬지 않고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한다. 틈틈이 올린 푸드트럭 '엘 헤페'의 페이지는 온라인에서 어마어마한 입소문을 타며 오프라인의 완판 행렬에 큰 도움을 준다. 푸드 트럭을 주차하고 아들이 위치를 함께 포스팅하자 인파가 몰려오는 식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푸드 트럭 매출 증가가 아닌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부자(父子)의 추억이다. 1초씩 매일 찍은 영상이 모여 완성된 아빠와 아들의 소중한 여행 동영상은 가슴이 짠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아들은 항상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칼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뻔한 시간만 보냈다. 나름대로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시장도 다니며 아빠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아빠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들은 서로 소중한 것을 공유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로 가까워지는 데 최고의 시간을 푸드트럭에서 함께 보낸다. 서툴지만 조금씩 표현하는 법도 배우고, 어떤 걸 좋아하고 사랑하는지도 알아간다. 그런 점에서 칼이 아들을 차분하게 혼내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아들은 조금 탄 토스트를 푸드트럭 개조를 도와준 일꾼들에게 그냥 주려고 하고, 아버지는 말린다. 그러자 아들은 어차피 돈도 안 내고 먹는 건데 그냥 주면 안 되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칼은 잠시 일을 마틴에게 맡기고 함께 내려가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완벽한 남편도 못 되었고, 완벽한 아빠도 아니지.
하지만 요리는 내가 자신 있어. 나는 이걸 잘할 수 있어.
내가 잘하는 이걸 통해 무언가를 얻어 왔고, 내가 이걸 할 때 행복해.
칼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소중함을 아들과 함께 나눈다. 이 모습은 책 속에 나오는 '노동의 중요성'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가슴에 와 닿더라. 일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라고 부쩍 느끼는 요즘이라 그런지 더욱.
푸드 무비답게 요리는 실감 나고 먹음직스럽다. 텍사스 바비큐, 뉴올리언스 베네 등 지역 명물들을 소개할 때는 무슨 맛일까 궁금증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 다각 다각 채소 다지는 소리만큼이나 귀가 즐거운 이유는 흥겨운 남미 음악 덕분이다. 라틴풍의 살사 리듬은 영화 전체 적재적소에 흘러나온다. 맛있는 음식만큼이나 절묘한 음악의 효과가 더해져서 푸드트럭이 가는 곳마다 즐거운 파티가 열린다. 한편 깐깐한 가게 주인 더스틴 호프만부터, 매혹적인 레스토랑 매니저 스칼렛 요한슨, 호색한 부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까지 전혀 예상치 못한 유명 배우들이 카메오 출연한다. 단순히 '푸드 무비'라 하기엔 요리 그 자체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하지만 가족의 재결합, 화해, 성공을 이끌어내는 열쇠로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소재다. 요리의 즐거움과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행복한 114분이다. (더 많은 요리와 어벤저스 스타를 보고 싶다면 넷플릭스 <더 셰프 쇼>를 보는 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