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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Sep 28. 2019

청춘이라면 사랑과 '족구'를 그대 품 안에

[영화] 족구왕 (The King of Jokgu , 2013)


○ 백해무익한 족구의 유일무이한 존재의 이유


멋도 없고, 이성에게 인기도 없고. 게다가 취업 스펙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족구. 그리고 그것에 목매는 순진한 복학생. B급 소재, 병맛 코드로 중무장한 <족구왕>은 A급 영화로 돌아왔다. 2013년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 월드 프리미어로 선보인 지 1년 만에 <족구왕>이 정식 개봉했다. (당시 전회 매진은 물론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정도로 뜨거운 영화였다.) 2013년 상반기 <한공주>의 조용한 흥행 열풍으로 '인디 버스터'란 칭호를 얻었다면, 하반기는 두말할 필요 없이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 시대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녀> 등을 넘어 무려 80만 관객을 동원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까지 해외 예술 영화의 호황 속에서 한국 독립영화의 자존심을 지킬만한 걸작이 나왔다.


주인공 홍만섭(안재홍)은 이제 갓 전역한 아싸 복학생이다. 영어 수업은 어색하고, 학자금 대출은 그대로고, 과방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게다가 기숙사 룸메이트 과 선배(박호산)는 '연애'와 '족구'에 목매는 만섭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나 하라며 잔소리를 하지만, 만섭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첫눈에 반한 안나(황승언)와 조모임을 같이 하고, 나름 친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사랑 '족구'는 쉽지 않다. 족구장이 사라지며 족구를 즐길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임시방편 팩 차기로는 족구에 대한 열망을 달랠 수 없던 만섭은 결국 단짝 친구 창호(강봉성)와 족구장 건립을 총장에게 건의한다. 다들 '족구 하는 소리'하고 있다고 무시하지만 어느덧 족구 열풍이 불고 결국 족구대회는 열린다. 안나의 남자 친구이자 국가대표 축구 선수 출신 강민(정우식)이 속한 해병대와 한판 대결을 앞둔 만섭은 자기 스타일대로 연애와 족구 모두 포기하지 않는다.



○ 좌충우돌 스포츠 성장기. 소재는 족. 구.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치밀하거나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영어 대사를 길게 읊는 장면이나 다듬어지지 않은 CG 부분은 다소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원 없이 웃을 수 있고, 재기 발랄함을 끊임없이 느낄 수 있더라. <족구왕>에선 루저들이 사랑하는 스포츠 '족구'를 마음껏 가지고 놀며 유쾌함을 끝까지 밀고 간다. 영화는 <으라차차 스모부>, <워터보이즈> 같은 스포츠가 결합된 일본의 청춘 영화와 비슷한 공식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칠듯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복학생 만섭이 있다. (순정만화 느낌의 강민과 다르게 너무나 순박한 이름 만섭!) 다나까 말투를 버리지 못한 채 눈치를 살피면서도, 싹싹하게 고깃집 아르바이트나 교내 근로를 척척 해내는 생활연기의 최고봉이었다. 물론 '스텝 바이 스텝' 족구의 기본기를 가르쳐 주는 만섭의 모습은 족구 교본을 보는 것 같았다. "어렵지 않죠?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아요."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배우들의 족구는 진짜였다. 실제 선수들의 족구는 놀라울 정도로 예술적이지만, 교내 운동회나 부대 체육대회라면 딱 이 정도 수준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아슬아슬하고 박진감 넘치는 우리네 족구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실제 하남시청 소속 족구 선수의 도움으로 주 3회 족구 연습을 했다더라.) 족구대회에 참가하는 학과별 마크 또한 기발했다. 우문기 감독이 미술감독 출신이라 그런지 소소한 부분이지만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족구왕>은 '백 투 더 퓨처'를 묘하게 빌린 SF영화 같기도 하고, 안나와 만섭의 로맨스(?)를 그린 멜로 영화 같기도 하고, 화려한 발길질로 가득 찬 액션 영화 같기도 하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캠퍼스 물이기도 하며, 박진감 넘치는 승부가 담긴 스포츠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가장 와 닿는 장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재밌으니깐' 뭐든 할 수 있는 청춘 영화다.



○ 재밌으니깐. 가장 단순하지만 제일 진심이 담긴 청춘의 이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흘러나오는 노래는 페퍼톤스의 '청춘'이다. 청량한 분위기의 밝고 해맑은 OST는 영화를 본 관객 모두의 가슴을 뛰게 한다. 특히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청춘, 그 중심에 있는 20대는 마냥 웃기보단 먹먹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대한민국 20대는 '아프니깐 청춘이다'란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를 억지로 주문받으며 고통받는 세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쉽사리 줄지 않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공강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한다. 또 누군가는 토익, 인턴, 대외활동 어느 하나 쉽지 않은 경험을 한꺼번에 요구받는다. 심지어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할 봉사활동마저 스펙의 하나로 취급받을 뿐이다. 모든 경험과 선택의 이유는 오직 '스펙'이 되어버린 슬픈 현실에서 <족구왕>은 잊고 지냈던 '낭만'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만섭이 족구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재밌으니깐." 가장 단순하고 진실한 동기를 관객들도 모두 알고 있다. 다만 부가적인 이유 때문에, 예를 들면 학점'때문에', 취업을 '위해서' 애써 모른 체할 뿐이다. 대다수는 단순한 끌림과 즐거움을 곧 다가올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잠시 접어둬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서 현재의 확실한 행복을 지나치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괜히 쪽팔리니깐, 남들이 뭐라 할 것 같아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차마 못 하고, 해야만 하는 일에만 목매지 말라고 만섭은 말한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꼭 진지하지 않아도 좋다. 반드시 자소서 스펙에 한 줄 올라가지 않더라도 괜찮다.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분명 티끌만 한 점이라도 성장한 것이다.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설 기회가 충분, 아니 남아 있는 게 청춘의 특권이란 걸 <족구왕>은 병맛 같은 족구로 열심히 어필하고 있다.(청춘은 실패해도 괜찮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건 너무 희망고문인 것 같다. 그저 상대적인 것이다.) <족구왕>을 보며 나는 한 뼘, 아니 손톱만큼이라도 하고 싶은 게 뭔지 천천히 생각해봤다. 적어도 평일 저녁 회식과 겸해서 하는 족구는 아닌 게 확실하다. 하지만 팀장님을 향한 안정적인 리시브는 몸이 먼저 반응하는구나.





+ 페퍼톤스의 <청춘> 뮤직비디오.


++ 내 기억 속 안재홍은 복학생인데 언제 이렇게 훈남이 된 거지!!

 그러고보니 <한공주>와 <족구왕>의 주인공이 <멜로가 체질>에서 만났네.


JTBC <멜로가 체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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