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샘바리 Sep 27. 2019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마주해야만 하는 추악한 현실

[영화] 한공주 (Han Gong-ju , 2013)


○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결코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꼭 봐야만 하는 영화다. <한공주>는 2004년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라는 공주(천우희 역)의 조심스러운 말과 함께 영화는 시작한다. 이수진 감독은 플래시백을 적절히 사용하며 사건 자체가 아니라 한공주라는 캐릭터에 주목한다. 한공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단서를 주지 않지만, 공주의 행동과 말에서 상처와 아픔을 쉽게 눈치챌 수 있더라. 공주는 끔찍한 일을 겪고 전학을 떠난다. 지난 학교 선생님의 어머니, 조여사 집에서 잠시 함께 사는 공주는 마음의 벽을 굳게 닫고 지낸다. 그나마 수영을 배우고, 이어폰을 꽂은 채 노래를 듣는 게 유일한 일과였다. 그리고 공주가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동급생 은희(정인선)가 살갑게 다가오며 상처 입은 공주는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오려 한다. 하지만 가해자의 가족들이 등장하고, 이기적인 어른들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은 슬픔보다 분노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극적 사건을 영화 뒤쪽에 숨겨뒀다가 밝히는 구성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공주>도 혹여 의도와 달리 과거에 일어난 사건 자체가 영화의 핵심으로 비칠까 우려해서 초반부터 단서를 나누어 제공했고 (중반인) 60분 지점부터 사건을 보여주었다.
-이수진 감독


성폭행, 자살, 학교 폭력. 이미 한국 영화에서 많이 다룬 소재지만 <한공주>만큼 조심스럽고 인상적으로 다룬 영화는 없을 것 같다. 이수진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더욱 이해가 빠르다. 하지만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조명하려 할수록 분노가 더욱 치미는 건, 실제 사건이 경악스럽기 때문이겠죠. 한편 <한공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극찬하고 부산국제영화제, 제13회 마라케시 국제영화제, 제16회 도빌 아시아 영화제에서 수많은 트로피를 휩쓸었다. 자극적인 편집보다는 제2, 제3의 수많은 한공주를 배려한 감독의 따뜻하고 섬세한 연출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 "너, 나 알아?"


감독의 연출이 영화의 절반이라면 나머지는 온전히 주인공 한공주를 연기한 천우희의 공이다. <써니>에서는 병을 깨고 쌍욕을 하는 본드녀, <우아한 거짓말>에서는 삶은 버겁지만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는 미란. 각기 다른 여고생 역할을 이렇게도 변화무쌍하게 해낼 수 있는 점은 오롯이 그녀의 탄탄한 연기력 덕분이다. 매우 소극적이고 답답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한공주의 모습은 천우희 말고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천우희는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 하지만 불안하고 위태로운 감정선이 간신히 이어지는 캐릭터를 눈빛 하나, 몸짓 하나로 완벽하게 그려냈다. 혼자 노래를 부를 때 한없이 평온한 모습. 밀려드는 가해자 가족의 윽박지름에 냅다 도망치는 모습. 극과 극의 모습을 연기하면서도 한 번도 과하거나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더라. 누군가를 탓하지도 않고, 원망하지 않고 조용히 스스로 아픔을 꽁꽁 감추는 한공주. 여배우가 역할에 지나치게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할까 걱정될 정도로 무섭도록 섬세하고,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공주는 편의점 알바로 사회생활을 경험하며 이미 눈치에 도가 튼 아이였다. 울화통이 터지는 아빠 밑에서도 강한 자립심을 바탕으로 잘 지내왔다. 하지만 그날의 사건 이후 공주는 달라졌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적당한 눈치가 이제는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발버둥으로 변했다. 공주는 답답할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속으로 삭힌다. 동갑내기 또래들에게야 "너 나 알아?"라고 쏘아붙이며 최대한 멀리 거리를 두려 하지만, 성인들 앞에서는 철저히 약자의 신세로 허리 숙인다. 공주는 산부인과에서 남자 의사가 들어왔을 때도 당당하게 여의사로 바꿔달라고 말하지 못한다. 조여사가 함께 사는 걸 싫어하자, 눈치껏 계산을 도와주거나 등을 밀어드린다. 한 번쯤은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욕지거리하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했으면 하지만, 공주는 입을 열지 않는다. 아니, 입을 열지 못한다. 큰 상처를 입었을 때 어른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이성적 사고를 하는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숨어 다녀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은 없지 않았을 텐데.



○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 봐.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공주가 수영을 배우는 이유는 너무나 애처롭다.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 봐, 마음이 바뀔까 봐 50m를 완주하는 게 목표가 되어 버린 소녀를 누가 위로해줄까? 은희와 아카펠라 동아리 친구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공주가 돌아오도록 손을 내민다. 별 거 아닌 일에 까르르 웃고, 사소한 수다를 떨며 인생의 재미를 알아가는 여고생의 소중한 하루 말이다. 조금 진부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살짝 동성애 코드가 가미되었고, 은희 자체가 공주의 차가운 대꾸에도 한없이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성장 드라마의 반장 같은 역할이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고독한 공주를 위해서는 이런 캐릭터라도 마냥 반갑더라. 그리고 영화가 그대로 끝나기를 간절히 바랬다. 노래 부르는 영상을 UCC로 올리고, 좋아서 손뼉 치는 아이들 곁에서 공주가 서서히 또래 곁으로 섞이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다짜고짜 피해자를 찾아와 합의를 강요하는 어른들 때문에 공주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영화 속 어른들은 하나같이 울화가 치밀게 한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권위적이고 무능력한 아빠, 살며시 발을 빼며 책임을 떠넘기려는 교장, 피해자를 보듬기는커녕 오히려 다그치며 욕을 하는 경찰, 그리고 제 새끼는 원래 나쁜 아이가 아니고 억지로 했다고 옹호하는 학부모. 진짜 악마는 평범한 방관자의 모습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한편, 입체적이고 인상적인 캐릭터는 조여사(이영란)다. 일반 관객이 딱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다. (조금 더 냉소적으로 생각하면, 집단 성폭행 현장에서 자기 아들만 쏙 빼내오는 나약한 동윤이 아버지(임동석)의 모습이 다수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경계심을 보이지만 어느 정도 금전적 보상을 받고, 싹싹하게 일을 도와주니 조여사는 공주를 받아들인다. 공주의 사연을 듣고 나서도 안타까워하고, 가해자들을 욕하지만 그 이상은 나아가지 않는다. 딱 자기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두고 적당한 관계를 유지한다. 조여사는 먼저 손을 내밀지 않고 슬그머니 거리를 두고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안타까워하고 가여워하지만, 실상 가까이 다가오면 살며시 복잡한 일은 피하려는 이기심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어른이라면, 말은 하지 못하지만 제발 도와달라고 몸서리치는 아이를 보고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나이 몇 살 더 먹은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아직 불완전한 아이들을 보듬어야 하는 건 어른의 도리기 때문이다. 물론 무조건 모든 걸 용서하고 안아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한 청소년에게 따끔한 엄벌을 내리는 것도 어른의 몫이다. (가해자들이 고릴라 가면을 쓴 건 아마 짐승과도 같은 인간 이하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부디 엔딩 장면에서 '한공주!'를 애타게 응원하는 목소리가 거기서 그치지 말고, 아직 수영도 완벽히 배우지 못한 주인공을 꺼내 줬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꼰대'가 판치는 세상에서 위트 있는 '신사'를 꿈꾸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